
왜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을까요. 영화가 끝나고 나서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 그거였습니다. 이상하게도 저는 인조보다, 예전에 같은 팀에서 일하던 동료 얼굴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한 나라의 왕 이야기인데, 보고 나오면 자꾸 직장 생각이 나는 영화. 이게 과장 같지만, 막상 겪어본 사람은 압니다. 구조가 똑같다는 걸요.
침묵이 선택이 되는 순간
“나쁜 결정보다 더 나쁜 게 있다”는 말, 예전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겼습니다. 근데 남한산성을 보고 나서는 그 말이 좀 다르게 들렸습니다. 틀리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보내는 게 더 무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조선은 청나라에게 무릎을 꿇을지, 끝까지 버틸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살기 위해 숙이자는 쪽도 있었고, 그렇게 살 바엔 죽겠다는 쪽도 있었습니다. 지금 와서 보면 둘 다 이해는 갑니다. 근데 그 사이에서 제일 중요한 자리에 있던 왕은 계속 미룹니다. 오늘 말 못 하고, 내일로 넘기고, 또 하루 넘기고. 그 사이에서 시간은 그냥 흘러갑니다. 이 장면 보는데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예전에 같은 팀에서 일할 때 비슷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기준에 안 맞는 건데도 그냥 진행해야 하는 상황. 저도 알고 있었고, 옆에 있던 동료도 알고 있었습니다. 회의실 안에서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이미 방향은 정해진 분위기였고, 괜히 거기서 딴 얘기 꺼내면 분위기 깨질 것 같았으니까요. 괜히 나섰다가 내가 책임질 것 같기도 했고요. 회의 끝나고 나와서야 말했습니다. “이거 좀 아닌데…” 근데 그 말은 이미 늦은 말이었습니다.
그날은 그냥 넘어갔습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오히려 편했습니다. 괜히 부딪히지 않았고, 하루는 조용히 끝났으니까요. 근데 이상하게 그게 계속 남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도, 다음 날 출근해서도 머릿속에서 한 번씩 떠오릅니다. “내가 그때 말했어야 했나.” 남한산성도 비슷해 보였습니다. 아무도 선택을 안 한 게 아니라, 계속 “나중에 하자”는 선택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되는 쪽으로, 최대한 미루는 쪽으로요. 그게 그 순간에는 제일 편하니까요. 근데 그게 쌓이면 결국 더 큰 상황이 됩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제가 피하고 싶었던 건 틀린 선택이 아니라, 선택하고 나서 따라오는 책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남한산성 안에서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던 이유랑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게 좀 오래 남았습니다.
말 못 하는 사람들이 버티는 구조
영화에서 제일 오래 남은 건, 사실 신하들의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성벽 위에서 그냥 서 있던 병사들 모습이었습니다. 누가 옳은지, 어떤 선택이 맞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 그냥 시키는 대로 그 자리에 서서 버텨야 하는 사람들. 한겨울인데 옷도 제대로 못 입고, 눈 맞으면서 서 있습니다. 손발 다 터지고, 감각 없어지고, 그래도 내려올 수 없습니다. 그 장면 보면서 좀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냐면 너무 익숙해서요. 직장에서도 비슷한 순간이 있습니다. 결정이 늦어질수록 위에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 밑으로 내려옵니다. 결국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 시간을 대신 버팁니다. 위에서는 방향을 고민하고, 아래에서는 그냥 결과를 감당합니다. 저도 한 번 크게 겪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똑같았습니다. 문제 될 거 알면서도 아무 말 안 하고 넘어갔던 일. 몇 주 뒤에 결국 터졌습니다. 예상했던 그대로요. 그때 회의가 다시 열렸는데,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습니다. “왜 이걸 미리 얘기 안 했냐.”
그 말 듣는데, 진짜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말할 기회가 없었던 게 아니라, 우리가 안 한 거니까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앞에 나가서 설명하고, 상황 정리하고, 욕 다 먹은 건 제 옆에 있던 동료였습니다. 회의 끝나고 나왔을 때 그 친구가 했던 말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때 그냥 말할걸…”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습니다. 억울하다는 말보다 더 무겁게 들립니다. 남한산성 성벽 위 병사들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자기가 선택한 싸움이 아닌데, 그 결과는 몸으로 다 받아내야 하는 상황. 이게 제일 현실적으로 와닿는 부분이었습니다.
지도자의 선택이 남기는 것
남한산성을 보기 전에는 단순하게 생각했습니다. “왕이 잘못된 선택을 해서 나라가 망했다.” 근데 보고 나니까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건 틀린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을 안 한 문제였습니다. 왕은 계속 미룹니다. 오늘 결정을 못 하고, 내일로 넘기고, 또 하루를 넘깁니다. 그 사이에서 상황은 계속 나빠지는데도요. 밖에서는 이미 다가오고 있는데, 안에서는 아직도 고민 중입니다. 결정해야 하는 사람은 계속 생각만 하고 있고, 시간은 아무 말 없이 흘러갑니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 내린 선택은 선택이라기보다, 이미 밀려서 더 이상 도망갈 데가 없는 상태에서 내린 결정에 가깝습니다. 그때는 이미 늦은 거죠. 선택이라기보다는 그냥 받아들이는 쪽에 가까운 상황. 이게 제일 불편했습니다. 왜냐면 이게 남 얘기가 아니라 제 얘기 같아서요. 어릴 때는 그냥 말했습니다. 아닌 건 아니라고. 틀릴 수도 있었지만, 적어도 미루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끔 분위기 망치기도 했고, 괜히 튀는 애처럼 보일 때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덜 남았습니다. 그날 할 말은 했다는 느낌이 있어서요. 지금은 다릅니다. 말하기 전에 계산부터 합니다. 이 말하면 누가 불편해할지, 내가 괜히 튀는 건 아닌지, 나중에 나한테 돌아올 게 뭔지. 그래서 대부분 그냥 넘깁니다. 그게 더 편하니까요.
당장 부딪힐 일 없고, 괜히 눈치 볼 일도 줄어드니까요. 근데 이상하게 그게 계속 남습니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생각나고, 씻다가도 문득 떠오르고, 별거 아닌 장면인데도 괜히 다시 생각이 납니다. “내가 그때 말했어야 했나.” 그 한 문장이 계속 머릿속을 맴돕니다. 이미 지나간 일인데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타이밍인데도요. 남한산성은 그 질문을 가장 늦은 타이밍에 던지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미 다 지나간 뒤에야 깨닫게 만드는 방식으로요. 그래서 더 불편했습니다. 조금만 더 빨리, 조금만 덜 미루고, 조금만 덜 계산했으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계속 남아서요. 결국 이 영화가 남기는 건 거창한 교훈이 아니라 하나의 찝찝한 감정입니다. 지금 나는, 선택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미루고 있는 건지. 이 세 가지가 남한산성 안에서 벌어진 일이고, 제 경험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