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점 9점대를 유지한 채 30년 넘게 회자되는 영화가 있습니다. 1990년 개봉한 사랑과 영혼입니다. 처음 이 영화를 본 건 그냥 좋아하는 배우가 나온다는 이유였습니다. 근데 끝나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감정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제대로 느꼈습니다.
첫 감정,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 먼저였습니다
어릴 때 저는 데미 무어를 그냥 좋아했습니다. 이유는 없었습니다. 누가 왜 좋냐고 물으면 설명도 못 했습니다. 그냥 나오면 더 보게 되는 사람. 그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영화를 틀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내용 거의 이해 못 했습니다. 사랑이 뭔지도 몰랐고, 이별이라는 개념도 머리로만 아는 수준이었습니다. 근데 마지막 장면에서 무너졌습니다. 패트릭 스웨이지가 연기한 샘이 몰리를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웃고, 그리고 천천히 뒤돌아서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 그 장면에서 저는 그냥 울었습니다. 슬퍼서인지, 음악 때문인지, 분위기에 눌린 건지 지금도 정확히 설명 못 합니다. 근데 중요한 건 하나였습니다. 멈출 수가 없었다는 것. 눈물이 계속 나왔습니다. 혼자 TV 앞에 앉아 있는데, 괜히 들키기 싫어서 소리도 못 내고 그냥 참고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 끝났는데도 계속 생각이 났습니다. 누워서 눈 감으면 그 장면이 또 나오고, 또 나오고. 그날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아, 나 이런 감정 느끼는 사람이구나. 그전까지는 감정이라는 게 그냥 웃거나, 화내거나 그 정도였는데 그날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설명은 안 되는데, 분명히 안쪽 어딘가가 건드려진 느낌. 누가 억지로 건드린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스스로 올라온 감정.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영화가 좋아서라기보다 처음으로 “잃는다는 감각”을 몸으로 받아들인 순간이었습니다.
표현 방식, 감정 회로가 열리지 않는 사람에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감동으로 끝이 안 납니다. 꼭 하나가 따라옵니다.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을까.”저는 솔직히 못 하는 쪽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오히려 더 계산하게 됩니다. 괜히 부담 줄까 봐, 괜히 어색해질까 봐, 괜히 내가 먼저 나서는 사람이 될까 봐. 그래서 그냥 평소처럼 대합니다. 티 안 내는 게 배려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결과는 늘 비슷했습니다. 관심 없는 줄 알았다. 이 말 들으면 진짜 멍해집니다. 억울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박도 못 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한 게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있었는데, 행동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상대 입장에서는 없는 거랑 똑같은 겁니다. 한 번은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말해야 하는 타이밍이 있었습니다.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순간. 근데 그 몇 초 사이에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지금 말하면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닐까 괜히 분위기 망치는 건 아닐까 조금만 더 기다리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이 생각들이 한 번에 올라옵니다. 그리고 결국… 아무 말도 못 합니다. 그 순간은 그냥 지나갑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근데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집에 와서 혼자 있으면 그 장면이 계속 떠오릅니다. 이미 끝난 상황인데도 머릿속에서 계속 다시 재생됩니다. 그때 왜 가만히 있었지. 그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웠나. 이게 하루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며칠 가고, 가끔 몇 년 뒤에도 갑자기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같은 결론으로 돌아옵니다. “나는 표현을 못 하는 사람이구나.”이게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표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쪽에 가까워집니다. 감정을 계속 눌러온 사람일수록 정작 꺼내야 할 순간에 더 버벅거립니다.
결국 남는 건 영화보다 ‘그때의 나’
지금 다시 사랑과 영혼을 보면, 솔직히 줄거리부터 떠오르진 않습니다. 누가 어떻게 됐고, 어떤 설정이었는지보다 먼저 올라오는 건 그때의 제 모습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그냥 데미 무어 나온다는 이유 하나로 틀었다가 이유도 모르고 울어버렸던 그날. 그때 저는 감정을 이해해서 운 게 아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는 하나도 못 했습니다. 근데 몸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머리보다 먼저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게 좀 이상했습니다. 왜 우는지도 모르겠는데, 멈추질 않으니까요. 집에 와서도 한동안 멍했습니다. 밥 먹으면서도 생각나고, 씻으면서도 생각나고, 괜히 아무것도 아닌데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상태.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처음이었습니다. “잃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를 어렴풋이 느꼈던 순간. 실제로 누군가를 잃은 것도 아니었는데, 그 감정이 미리 한 번 들어온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데도 그 장면이 아직도 안 지워집니다. 내용은 솔직히 많이 흐릿해졌습니다. 누가 어떤 대사를 했는지도 가물가물합니다. 근데 그날의 분위기, 그때의 감정, 그리고 TV 앞에 앉아서 혼자 울고 있던 제 모습은 이상하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좀 웃깁니다. 그때는 그냥 영화 한 편이었는데, 지금은 제 기억 한 조각처럼 남아 있으니까요. 그리고 더 솔직히 말하면, 그때의 저랑 지금의 저가 완전히 다르지도 않습니다. 여전히 저는 중요한 순간에서 한 번 더 생각합니다. 말할까 말까, 지금이 맞나, 괜히 이상해지는 거 아닌가. 그리고 가끔은 또 놓칩니다.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이 영화가 떠오릅니다. 정확히 장면이 떠오르는 건 아닌데, 그때 느꼈던 감정이 비슷하게 올라옵니다. “아… 또 늦었네.”그래서 요즘은 한 가지는 분명히 느낍니다. 영화는 시간이 지나면 흐릿해지는데, 그때의 나는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는 것. 어떤 장면을 봤는지 보다 그때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가 더 오래갑니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영화를 볼 때 도내용만 보게 되지 않습니다. “지금 나는 어떤 상태지”“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왜 이런 느낌이 들지”이 걸 같이 보게 됩니다. 예전에는 영화가 끝나면 끝이었는데, 지금은 끝나고 나서가 더 길어졌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잘 만든 영화라서가 아니라, 그때의 나를 처음으로 마주하게 만든 영화라서. 앞으로도 아마 계속 떠오를 겁니다. 영화를 다시 봐서가 아니라, 비슷한 순간을 또 겪을 때마다. 그럴 때마다 아마 똑같이 생각할 겁니다. “이번에는 조금만 덜 늦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