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로움은 혼자 있을 때 찾아오는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는 3년 넘게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 곁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그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누군가 옆에 있는데도 그 사람의 기억 속에서 내가 사라지는 감각, 그게 사람을 가장 이상하게 갉아먹습니다. 영화 아멜리에는 바로 그 감각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걸어옵니다.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
아멜리에의 주인공 아멜리는 어릴 때부터 혼자였습니다. 군의관 출신 아버지는 늘 바빴고,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떴습니다. 그녀가 외로움을 버텨온 방식은 상상이었습니다. 현실 대신 머릿속 세계를 만들고, 그 안에서 작은 기쁨을 찾는 것. 어떻게 보면 굉장히 비생산적인 방식이지만, 저는 그게 꽤 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외로움은 혼자 있을 때 찾아오는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는 3년 넘게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 곁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그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누군가 옆에 있는데도 그 사람의 기억 속에서 내가 사라지는 감각, 그게 사람을 가장 이상하게 갉아먹습니다. 영화 아멜리에는 바로 그 감각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걸어옵니다. 저는 그 방식이 비현실적이라기보다, 오히려 버티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실제로 겪어보면 알게 됩니다. 사람이 계속 버티려면, 현실 말고 도망칠 구멍 하나쯤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요즘 그 구멍 없이 버티고 있는 기분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같은 하루가 시작됩니다. “밥 먹었냐”는 질문을 또 듣고, 또 대답합니다. 처음에는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근데 다섯 번째쯤 되면 목소리가 바뀝니다. 열 번째쯤 되면 설명이 아니라 그냥 반복이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제가 대화하는 게 아니라 ‘처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때 멈칫합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지.”그 감정은 죄책감보다 더 불편합니다. 내가 나를 낯설게 느끼는 순간이라서요. 아멜리가 사람들을 도와주고 돌아와 혼자 밥을 먹는 장면에서 저는 멈췄습니다. 밖에서는 따뜻한 사람이었는데, 문을 닫는 순간 아무도 없는 상태. 그 구조가 너무 익숙했습니다. 저도 비슷합니다. 하루 종일 누군가 옆에 있었는데 막상 제 하루를 떠올리면, 같이 나눈 감정은 없습니다. 사람은 있었는데 관계는 없었던 하루. 그게 반복되면 외로움이 아니라, 공허함이 됩니다.
돌봄 소진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구조
“가족이니까 당연히 해야지”이 말, 저는 이제 좋게 안 들립니다. 이 말 한마디로, 내가 느끼는 감정은 전부 설명 없이 넘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같은 말을 스무 번 들으면, 스물한 번째에는 표정이 굳습니다. 서른 번쯤 되면, 말투가 짧아집니다. 그리고 그걸 스스로 알아차립니다. 그 순간 드는 생각은 하나입니다. “나 왜 이러지”가 아니라 “나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근데 더 솔직하게 말하면 그건 성격 문제가 아닙니다. 버티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생기는 변화입니다. 치매 돌봄은 사건이 아니라 반복입니다. 큰일이 터지는 게 아니라, 작은 일들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 반복 속에서 감정의 기준이 계속 낮아집니다. 처음에는 미안했던 일이나중에는 그냥 ‘귀찮은 일’로 바뀝니다. 그 변화를 느끼는 순간, 사람은 스스로를 못 믿게 됩니다. 이게 케어기버 번아웃이라고 부르는 상태라는 건나중에 알았습니다. 근데 이름을 안다고 해서 덜 힘든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정확해졌습니다. 아, 이게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상황이 사람을 이렇게 만드는 거구나. 근데 그렇다고 덜 괴로운 건 아니었습니다.
아멜리에가 제안하는 삶의 순간
아멜리가 변하는 계기는 거창하지 않습니다. 벽 속에 숨겨진 상자 하나. 그걸 돌려주면서 하루가 달라집니다. 처음엔 솔직히 납득이 안 갔습니다. “저거 하나로 사람이 바뀐다고?”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니까요. 저는 매일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할머니가 몇 시에 일어나고, 언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어느 타이밍에 불안 해하는지까지 이제는 거의 외운 수준입니다. 이 생활에서 뭔가 하나 바뀐다고 인생이 달라질 거라는 생각은 잘 안 듭니다. 그래서 더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근데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아멜리가 바뀐 건 “상자 때문”이 아니라 그 순간 자기감정을 다시 느꼈기 때문이라는 걸. 저한테 그건 영화 한 편이었습니다. 아멜리에를 본 그날. 할머니가 주무시는 두 시간, 평소처럼 핸드폰을 보다가 그냥 꺼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영화를 틀었습니다. 처음엔 집중도 잘 안 됐습니다. 중간에 할머니 깨실까 봐 신경 쓰이고,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어쩌나 계속 귀를 열어두고 있었습니다. 근데 어느 순간부 터그걸 잠깐 잊고 있더라고요. 장면 하나에 웃고, 어떤 장면에서는 괜히 울컥하고,“아, 저건 좀 이상하다” 생각도 들고. 그냥 반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생각보다 낯설었습니다. 요즘 제 일상은 반응하는 삶이 아니라 버티는 삶에 가까웠으니까요. 웃을 일 있어도 그냥 넘기고, 짜증 나도 눌러버리고, 감정이 올라와도 “지금은 안 된다” 하고 밀어두는 게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근데 그 두 시간 동안은 그걸 안 했습니다. 그냥 느꼈습니다. 그게 별거 아닌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오래 남았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하루를 버티는 게 아니라 그 두 시간을 기다립니다. 이게 맞는 건지, 아닌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현실은 그대로인데 그 두 시간 때문에 괜찮다고 느끼는 게 좀 비겁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근데 또 한편으로는 압니다. 그 두 시간이 없으면 나는 더 빨리 무너질 거라는 걸. 사람은 계속 버티기만 하면 어느 순간 아무 느낌도 없어집니다. 그 상태가 제일 위험합니다. 힘든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아닌 상태. 그래서 요즘은 생각을 조금 바꿨습니다. 이 시간을 도망이라고 보지 말고 숨 고르는 시간이라고 보자고. 어차피 다시 돌아가야 할 자리라면 잠깐이라도 빠져나와야 다시 버틸 수 있으니까요. 아멜리가 상자 하나로 바뀐 게 아니라 그 순간 자기감정을 다시 붙잡았던 것처럼, 저도 그 두 시간 동안 겨우 제 감정을 다시 붙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