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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호인 (원칙주의, 부림사건, 국가보안법)

by dailyroutine15 2026. 4. 7.

영화 변호인은 1981년 실제로 벌어진 부림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습니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솔직히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스크린 속 장면들이 연출이 아니라 실제 누군가의 삶이었다는 거니까요. 원칙 하나를 붙들고 버텼던 사람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뼈아프게 다가온 영화는 오랜만이었습니다.

원칙주의자가 무너지지 않은 이유, 부림사건

부림사건은 1981년 전두환 군부 정권 하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공안 조작 사건입니다. 공안 조작 사건이란, 국가 권력이 실제 위법 행위가 없는 일반 시민을 반국가 세력으로 둔갑시켜 기소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부산 지역의 학생, 교사, 회사원 등 20여 명이 영장도 없이 끌려가 가혹한 고문과 불법 구금을 당했고, 독서 모임에서 읽었던 책들이 이적 표현물로 분류되었습니다. 여기서 이적 표현물이란 국가보안법(國家保安法) 체계 아래 반국가 단체를 이롭게 한다고 판단되는 모든 출판물을 의미합니다. 당시 불온서적으로 지목된 책들이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책들인지 확인해 보면, 그 황당함이 더 선명해집니다.

  •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 역사학 방법론의 고전으로, 현재도 대학 역사학과 필독서
  •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 1970년대 도시 서민의 삶을 담은 소설로 현재 수능 필독서
  •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 베트남전을 포함한 동아시아 현대사를 다룬 비평서

이 책들이 반국가 활동의 증거라고 법정에서 주장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남용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국가보안법은 반국가 활동을 처벌하기 위한 형사 특별법인데, 그 조항의 추상성과 광범위한 적용 범위 때문에 인권 침해 수단으로 악용된다는 비판을 꾸준히 받아왔습니다(출처: 국가인권위원회).

영화 속 송우석 변호사가 이 사건에 뛰어든 것은 처음부터 거창한 신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이건 아닌데"라는 상식 하나였습니다. 저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이런 순간을 겪어본 적이 있습니다. 명백히 잘못된 방향인데도 분위기상 아무도 말을 못 꺼내고, 저도 그냥 넘어갔던 순간들이요. 송우석이 특별히 대단한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원칙을 보고도 눈 감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달라진 거라는 점이 이 영화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부림사건은 2009년 재심에서 일부 무죄 판결을 받았고, 2014년에는 국가법령정보센터 기준으로 추가 복권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회복되는 데 30년이 넘게 걸렸고, 그 30년 동안 가해자들은 어떤 법적 책임도 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보다 훨씬 더 씁쓸했습니다.

정의가 박수받아야 한다는 게 문제다, 국가보안법과 우리의 현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묘한 감정이 들었던 장면은 법정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송우석이 끌려온 진우의 상태를 보며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말이 웅변도 아니고 구호도 아닌, 그냥 상식을 가진 사람의 반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상식을 지키는 데 이렇게까지 많은 대가가 필요한 세상이었다는 게 저는 계속 머릿속에 걸렸습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조직 안에서 원칙을 말한다는 게 얼마나 에너지 소모인지 압니다. 맞는 말이라도 분위기를 거스르면 "저 사람 피곤하다"는 시선이 생기고, 그게 쌓이면 결국 침묵을 선택하게 됩니다. 송우석처럼 가족 협박까지 받는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일상적인 직장 생활에서 원칙과 눈치 사이에서 흔들리는 경험은 생각보다 자주 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단순히 과거 군부 독재 시절 이야기로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영화 속에서 논쟁의 중심이 된 것은 헌법 제1조, 즉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문이었습니다. 여기서 헌법(憲法)이란 한 나라의 최고 규범으로, 모든 법령은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효력을 가집니다. 당시 국가보안법이 이 헌법보다 상위에서 작동하듯 운용되던 방식은, 법 체계의 위계 자체를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법 전문가들이 지금도 국가보안법 개정 필요성을 꾸준히 제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출처: 대한변호사협회).

그리고 솔직히 이 영화에서 저는 한 가지 불편한 질문을 계속 받았습니다. 박수 치는 장면들, 감동적인 법정 연설들, 그 장면들이 뭉클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저게 대단해서"가 아니라 "저게 원래 당연했어야 하는데 너무 어렵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연한 상식이 용기로 포장되어야 하는 사회가 얼마나 비틀어진 곳인지, 영화는 아주 감동적인 방식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그 비틀림을 직시하게 만듭니다.

저는 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참을 멍하게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이겼냐, 졌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나라면 어디서 멈췄을까"라는 질문이 계속 남았기 때문입니다. 제 경험상 이건 예상 밖의 감정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러 갔다가 내 삶을 돌아보게 된 건 꽤 오랜만의 일이었으니까요.

영화 변호인은 역사 영화가 아닙니다. 이 사건의 무대가 1980년대일 뿐, 원칙을 지키는 것이 왜 이렇게까지 어려운 일이 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아직도 이적 표현물 논란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대가를 요구하는 구조는 형태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저처럼 "나는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신 분이라면, 그 질문을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질문이 쌓이는 게 결국 세상이 조금씩 달라지는 방식이니까요.

이 글은 개인적인 감상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법률 조언이 아닙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OekugpEQS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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