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 나가던 에이전트가 하루아침에 해고된다. 그 이유가 "사람답게 일하자"는 제안서 한 장 때문이었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처음 이 설정을 접했을 때 웃음이 나오면서도, 동시에 뭔가 찔리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1996년 개봉한 영화 제리 맥과이어는 그렇게 첫 장면부터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시스템이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가
스포츠 에이전트(Sports Agent)란 선수와 구단 사이에서 계약 협상, 스폰서십 유치, 커리어 관리 등을 대행하는 직종입니다. 쉽게 말해 선수의 모든 비즈니스적 창구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영화 속 제리 맥과이어는 72명의 선수를 혼자 관리하는 거대 매니지먼트 회사 SMI 소속 에이전트였습니다. 숫자만 보면 대단해 보이지만, 그 내면은 전혀 달랐습니다.
제리는 선수들을 만나는 때가 계약 직전이나 부상 직후뿐이었고, 그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이건 비단 제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저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비슷한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성과 지표 달성에 집중하다 보면, 함께 일하는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는 자연스럽게 후순위로 밀리게 됩니다. 그러다 어느 날 돌아보면 주변에 진심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게 되죠.
제리가 술기운에 써 내려간 제안서, 즉 "더 적은 선수, 더 많은 신뢰"라는 내용은 사실 업계 논리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제안서는 박수를 받았지만, 그 박수의 실체는 환영이 아니라 경쟁자 제거를 위한 신호였습니다. 이 장면 하나가 현대 조직 문화의 냉혹한 단면을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이른바 크레더빌리티 트랩(Credibility Trap), 즉 조직 내에서 올바른 말을 한 사람이 오히려 위협으로 분류되어 도태되는 구조를 영화는 아무 설명 없이 그냥 보여줍니다.
무너진 이후에야 보이는 것들
제리가 해고 후 선수들을 잡기 위해 전화를 돌리는 장면은 저에게 꽤 오래 남았습니다. 72명 중 따라나선 사람은 두 명뿐이었습니다. 경리부 싱글맘 도로시, 그리고 NFL 만년 후보 선수 로드 티드웰. 제리가 그동안 쌓아 올린 '관계'의 실체가 그 장면 하나로 드러납니다.
NFL(National Football League)은 미국 최대 미식축구 리그로, 선수 한 명의 계약 규모가 수백만 달러에 달합니다. 여기서 로드처럼 드래프트(Draft)에 지명되고도 주전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수년간 벤치를 지키는 선수를 업계에서는 프린지 플레이어(Fringe Player)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해 팀에 있긴 하지만 핵심 전력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선수를 가리킵니다. 로드는 오랜 시간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제리가 진짜 바뀐 건 바로 이 로드와의 관계에서입니다. 처음엔 로드도 제리의 고객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 팩트로 맞받아치는 싸움을 거치면서, 그 관계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로드가 "당신은 내 가족이 누군지, 내가 왜 이걸 하는지 알기나 하냐"라고 물었을 때 제리가 대답하지 못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저도 그 장면을 보면서 솔직히 제 자신이 떠올랐습니다. 결과에만 집착할 때는 상대방의 맥락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를.
영화 속에서 흥미로운 건 로드의 경기력이 달라진 이유입니다. 별다른 전술적 변화가 없었습니다. 단지 자신을 진짜로 신경 써주는 에이전트가 생겼다는 사실 하나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이 영화가 지금 우리에게 묻는 것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로드는 플레이오프에서 터치다운을 성공시키고, 제리는 도로시에게 돌아가고, 사업도 회복됩니다. 그런데 저는 솔직히 이 결말이 마냥 따뜻하게 느껴지지만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이렇게 다 잘 풀리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30년 가까이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결말 때문이 아니라, 과정에서 보여주는 질문들 때문입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핵심 질문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나는 지금 성과를 위해 일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과 함께 일하고 있는가
- 무너졌을 때 남아 있는 관계가 진짜 관계다
- 확신이 없는 선택을 계속 미루면, 결국 선택이 나를 대신한다
현대 조직에서 KPI(핵심성과지표)라는 개념은 이미 너무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KPI란 Key Performance Indicator의 약자로, 개인이나 조직이 목표 달성에 얼마나 근접했는지를 수치로 측정하는 지표를 말합니다. 이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문제는 KPI가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어버릴 때입니다. 그때부터 사람은 수단이 됩니다.
직장인 대상 조사에 따르면 성과 중심 평가 문화가 구성원 간 협업 의지를 오히려 저하시킨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습니다(출처: 한국노동연구원). 제리 맥과이어가 1996년에 이미 이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이 새삼 놀랍습니다. 오히려 지금 시대에 더 잘 어울리는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삶이 흔들리는 순간이 오면, 대부분의 사람은 잃어버린 것들을 먼저 셉니다. 그런데 제리 맥과이어는 그 자리에서 남아 있는 것을 세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제 경험상 무너지고 나서야 비로소 진짜 중요한 것이 뭔지 보이게 됩니다. 이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영화가 나쁜 게 아니라 영화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한번 보고 나서 "나는 지금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