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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삼림 (유통기한, 고립감, 옴니버스)

by dailyroutine15 2026. 5. 6.

저는 중경삼림을 처음 봤을 때 이게 왜 명작인지 몰랐습니다. 줄거리는 뚝뚝 끊기고, 카메라는 정신없이 흔들리고, 인물들은 혼잣말만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나면 장면보다 감정이 남습니다. 그 감정이 뭔지 분석하다 보니, 이 영화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유통기한이라는 집착

중경삼림을 처음 봤을 때 저는 솔직히 이해를 못 했습니다. 경찰이 통조림 유통기한 세고, 혼잣말하고, 헤어진 사람 생각하면서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이 처음엔 그냥 “감성 흉내 내는 영화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장면보다 감정이 남았습니다. 특히 223이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 모으는 장면은 나중에 다시 떠올릴수록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223은 헤어진 여자친구와의 관계에 스스로 유통기한을 정합니다. “5월 1일까지.” 처음엔 그냥 특이한 설정처럼 보였는데, 다시 보면 저건 사실 끝난 관계를 바로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지막 버티기 같은 행동입니다. 머리로는 이미 끝났다는 걸 압니다. 연락 안 오는 것도 알고, 상대 마음 떠난 것도 압니다. 그런데 사람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습니다. 괜히 휴대폰 진동만 울려도 확인하게 되고, 의미 없는 카카오톡 상태메시지 하나 바뀐 것도 괜히 신경 쓰입니다. 이미 끝난 관계인데도 혼자 아직 연결돼 있다고 착각하고 싶은 겁니다.

저도 비슷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퇴근길에 예전에 같이 걷던 길을 일부러 피하다가도, 어느 날은 또 괜히 그쪽으로 돌아가 봅니다. 막상 가 보면 달라진 건 없습니다. 사람도 없고, 기억만 남아 있습니다. 근데 이상하게 사람은 그 기억을 스스로 못 놓습니다. 놓는 순간 진짜 끝이 되는 것 같으니까요. 223이 유통기한 찍힌 통조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결국 같은 감정이라고 느꼈습니다. 끝났다는 사실보다, 끝을 인정하는 순간 오는 공허함이 더 무서운 겁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걸 애도 회피(grief avoidance)라고 설명합니다. 상실의 감정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시간을 끌거나 다른 행동으로 감정을 우회하는 심리입니다. 근데 저는 이게 꼭 나약해서 생기는 행동이라고는 생각 안 합니다. 오히려 사람은 정말 소중했던 관계일수록 바로 정리 못 합니다. 요즘은 다들 “쿨하게 잊어라”, “빨리 털어내라” 쉽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안 됩니다. 새벽에 괜히 예전 사진 다시 보고, 삭제했던 대화창 복구해보려 하고, 이미 차단된 번호인데도 한 번쯤 눌러보는 게 사람입니다.

영화 속 금발 여인도 비슷합니다. 선글라스, 가발, 레인코트로 자기를 완전히 감추고 살아갑니다. 겉으로는 차갑고 아무 감정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누구보다 지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여인이 잠든 장면보다, 223가 아무 말 없이 구두를 닦아주는 장면이 더 기억에 남았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누군가를 위로할 때도 말을 너무 많이 합니다. 근데 진짜 지쳐 있는 사람은 이상하게 긴 위로보다 조용한 행동 하나에 더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괜찮냐고 묻는 말보다, 그냥 옆에 잠깐 같이 있어주는 사람이 더 기억나는 것처럼요.

223의 이야기를 보다 보면 결국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끝난 감정을 끝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런 사람은 생각보다 주변에 정말 많습니다. 다만 다들 티를 안 낼 뿐입니다.

고립감, 연결된 시대가 더 외로운 이유

중경삼림 속 청킹맨션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좁은 복도, 시끄러운 간판, 부딪힐 정도로 가까운 거리. 그런데 영화 속 인물들은 이상할 정도로 외로워 보입니다. 저는 그게 지금 시대랑 너무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는 예전보다 훨씬 많이 연결돼 있는데, 이상하게 더 고립돼 있습니다.

퇴근길 지하철만 봐도 그렇습니다. 사람은 가득한데 분위기는 조용합니다. 다들 이어폰 끼고 핸드폰만 봅니다. 누군가는 릴스를 넘기고, 누군가는 게임하고, 누군가는 멍하니 창밖만 봅니다. 같은 공간 안에 있는데 완전히 각자 따로입니다. 예전엔 외로움이 혼자 있는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나이 들수록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을 때 느끼는 고립감이 더 크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순간이 많습니다. 점심시간에는 다 같이 웃고 떠드는데, 막상 혼자 담배 피우러 나가는 동료 뒷모습 보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말은 웃으면서 하는데 표정은 이미 지쳐 있는 사람들. 근데 누구도 먼저 힘들다고 말 안 합니다. 지금은 버티는 사람이 성실한 사람처럼 취급받고, 무너지는 사람은 자기 관리 못 한 사람처럼 보는 분위기가 분명히 있습니다. 저는 그게 꽤 잔인하다고 느낍니다.

예전엔 힘들다고 털어놓으면 왜 그러냐고라도 물어봤던 것 같은데, 지금은 “다 힘들지 뭐”라는 말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도 점점 더 자기감정을 숨깁니다. 괜히 말했다가 약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요. 근데 그렇게 참던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연락 끊고, 인간관계 정리하고, 회사 그만두는 걸 몇 번 보다 보니까 오히려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라는 말이 제일 무섭게 들릴 때가 있습니다.

중경삼림 속 인물들은 적어도 자기 외로움을 숨기지는 않습니다. 223은 대놓고 찌질하고, 663은 혼자 집에서 비누랑 수건에 말 걸고 삽니다. 처음엔 웃겼는데, 다시 보면 그게 그렇게 웃긴 장면이 아닙니다. 사람은 진짜 외로워지면 사물에도 감정을 붙입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괜히 TV 틀어놓고 자는 것도 비슷한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완전한 정적이 너무 외롭기 때문입니다.

근데 지금 시대는 외로움을 드러내는 것 자체를 어색하게 만듭니다. SNS 들어가 보면 다들 맛집 가고, 운동하고, 여행 가고, 자기관리하는 사진뿐입니다. 다 잘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근데 현실에서 만나보면 다들 지쳐 있습니다. 새벽까지 잠 못 자고, 이유 없이 우울하고, 사람 만나고 들어와서 더 공허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상처를 안 받는 게 아니라, 티를 안 내는 데 익숙해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중경삼림이 오래 남는 이유가 단순히 감성적인 영화라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사람이 많은 도시 안에서, 결국 각자 자기 외로움 하나씩 끌어안고 살아가는 모습을 너무 솔직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감정이 1994년 홍콩 이야기인데도 지금 우리 현실이랑 이상할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꼭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 나는 누구랑 진짜 대화를 했지?”

생각보다 바로 떠오르는 사람이 없는 날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오래 남는 것 같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mG6HoDpKP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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