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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더 라운드 (덴마크 정서, 불안 철학, 절제)

dailyroutine15 2026. 8. 3. 14:50

술에 실려 응급실에 간 날, 저는 천장을 바라보며 한 가지 생각만 했습니다. '분명히 즐겁게 시작했는데.' 《어나더 라운드》를 보다가 그 기억이 불쑥 올라왔습니다. 술로 자신감을 찾으려던 네 명의 교사 이야기가 영화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덴마크라는 나라가 만들어낸 정서, 그 출발점

《어나더 라운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덴마크라는 나라부터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예상 밖이었습니다. 배경이 이렇게까지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할 줄은 몰랐거든요.

덴마크는 일 년 내내 일조량이 부족하고, 여름과 겨울의 기온 차이가 거의 없는 나라입니다. 국토의 최고 지점이 해발 300m 남짓에 불과할 정도로 지형도 낮고 평평합니다. 그러니 지리적으로나 기후적으로나 이런 기후적 특징이 덴마크 문화와 예술 전반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는 해석이 많습니다. 《햄릿》의 배경이 덴마크인 이유는 북유럽 설화의 영향을 받은 역사적 배경에 가깝습니다. 다만 오늘날 많은 평론가들은 작품 특유의 음울한 분위기가 덴마크의 차갑고 침잠한 이미지와도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런 정서가 낳은 철학자가 바로 쇠렌 키에르케고르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주의 철학의 대표적인 선구자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실존주의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추상적 원리가 아닌 개인의 구체적 삶에서 찾으려는 철학적 태도입니다. 그는 저서 《불안의 개념》에서 불안(Anxiety)이란 단순히 제거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의 신호라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 불안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앞으로 나아갈 여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영화는 오프닝에서 키에르케고르의 구절을 직접 인용합니다. "젊음이란 무엇인가, 꿈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꿈의 내용이다." 이 한 줄이 영화 전체의 방향을 미리 알려주는 나침반이었습니다. 감독 토마스 빈터베르그는 덴마크의 음침한 정서와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을 재료 삼아 영화의 출발선을 깔아 두었습니다.

  • 덴마크: 낮은 일조량과 추운 기후가 문화와 예술에 영향을 준 나라
  • 키에르케고르: 불안을 자유의 가능성으로 해석한 실존주의 철학자
  • 《어나더 라운드》: 이 두 배경 위에 세워진 사회 실험 영화
요약: 덴마크의 우울한 기후와 키에르케고르의 불안 철학이 《어나더 라운드》의 토대이며, 영화는 처음부터 이 맥락 위에서 출발합니다.

 

술이 자신감을 줄 때와 빼앗을 때, 그 경계는 어디인가

영화의 핵심 설정은 단순합니다. 중년의 위기를 겪는 네 명의 교사가 혈중알코올농도(BAC, Blood Alcohol Concentration) 0.05%를 유지한 채 생활하면 삶이 나아지는지 실험해 보자는 것입니다. 혈중알코올농도란 혈액 100mL당 알코올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를 나타내는 수치입니다. 0.05%는 가볍게 한두 잔 마신 상태로, 긴장이 풀리고 기분이 약간 좋아지는 정도입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 봤는데, 딱 그 정도일 때가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편안하지만 아직 취한 것 같지 않아서, 한 잔 더가 쉽게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 네 친구도 처음에는 놀라운 성과를 거둡니다. 매즈 미켈슨이 연기한 마르틴은 수업이 살아나고, 체육교사 토미는 선수들과 가까워지고, 음악교사 니콜라이의 합창단은 처음으로 화음을 맞춥니다.

많은 평론에서는 이 장면을 디오니소스 신화와 연결해 해석합니다. 신화 속 디오니소스는 적당한 술은 긴장을 풀어주고 용기를 주지만, 선을 넘는 순간 인간을 황홀경에 빠뜨려 이성을 잃게 만든다고 전해집니다. 영화 속 네 친구가 걸어간 길도 이 구조와 닮아 있습니다. 황홀경이란 일상적 자아의 경계가 무너지며 극도의 흥분 상태에 이르는 경험을 뜻합니다.

영화가 보여주듯 그 선을 넘은 네 친구는 결국 이전보다 더 나쁜 자리로 떨어집니다. 마르틴의 결혼 생활은 회복이 아니라 파국으로 치닫고, 한 친구는 안타깝게도 돌아오지 못합니다. 제 주변에도 술만 마시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됐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가장 조용한 친구였는데, 어느 날 술기운에 낯선 사람과 시비가 붙고 길에서 노상방뇨까지 하는 걸 목격했습니다. 다음 날 본인이 가장 괴로워했습니다. 술이 본성을 드러낸다는 말, 저는 그날 이후 선뜻 동의하지 못합니다. 그건 본성이 아니라 이성이 무너진 자리에 남은 것이었으니까요.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알코올은 전 세계적으로 매년 약 300만 명의 사망과 연관되며, 이는 전체 사망의 5.3%에 해당합니다(출처: WHO 알코올 팩트시트). 숫자가 이렇게 크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영화가 던지는 '절제'의 메시지를 현실에서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요약: 혈중알코올농도 0.05% 실험은 처음엔 효과를 내지만, 선을 넘는 순간 디오니소스 신화처럼 이성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역전됩니다.

 

실패한 뒤에도 다시 춤출 수 있는가, 절제가 진짜 자유다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장면은 마르틴이 술을 마시는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고교 졸업식 파티 한복판에서 그가 다시 춤을 추는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그 춤은 환희처럼 보이면서도, 제게는 실패를 인정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삶으로 걸어 들어오는 몸짓처럼 느껴졌습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불안의 해소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것. 그때 비로소 불안은 자유를 향한 가능성으로 전환됩니다. 영화는 이 주제를 직접 설명하지 않고, 마르틴이라는 인물의 거듭된 실패와 마지막 한 걸음을 통해 보여줍니다. 저는 그 방식이 인상 깊었습니다.

또 하나 기억에 남은 장면이 있습니다. 마르틴이 수업 중 처칠, 루스벨트, 히틀러를 비교하는 대목입니다. 영화는 처칠과 루스벨트를 술을 즐긴 인물의 예로, 히틀러를 금주주의자의 사례로 제시합니다. 다만 이는 술의 효능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안과 선택을 설명하기 위한 영화적 장치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영화가 술을 예찬하는 게 아니라, 불안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를 던지는 장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술과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 결국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응급실 침대에 누웠던 그날 이후 저는 술자리에서 잔을 내려놓는 타이밍을 먼저 생각하게 됐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뒤 며칠 동안은 물만 마셔도 속이 쓰렸습니다. 밥을 조금만 먹어도 더부룩했고, 출근해서도 속이 불편해 일에 집중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술은 다음 날 아침이면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몇 시간 즐거웠던 대가를 제 몸은 며칠 동안 치르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사회생활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회식 자리에서 끝까지 남는 것이 예의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응급실에 다녀온 뒤에는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오래 버티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멈출 줄 아는 사람이 결국 자기 몸도 지키고 인간관계도 오래 이어간다는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런 일을 겪고도 회식 자리에 가면 분위기에 휩쓸릴 때가 있습니다. 머리로는 이제 그만 마셔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옆에서 잔을 채워주고 모두가 웃고 있으면 혼자 멈추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술은 개인의 절제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술을 권하는 분위기와 거절하기 어려운 관계까지 함께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도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이면 가장 먼저 제 속 상태부터 확인합니다. 예전에는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것이 사회생활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 더 오래 사회생활을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립정신건강센터 자료에 따르면 절제 음주(Moderate Drinking)는 1일 기준 남성 4잔, 여성 2잔 이하를 권고하며, 이를 초과하는 음주가 반복되면 건강 문제와 알코올 의존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고 안내합니다.(출처: 국립정신건강센터).

한편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음주 문화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도 자주 듣습니다. 한 번의 술자리 비용으로 다른 취미를 즐기겠다는 사람이 늘고 있고, 술 없이도 충분히 어울릴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변화가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 술 없이도 편안한 사람이 더 건강한 관계를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나더 라운드》가 묻는 건 하나였습니다. 당신은 술을 마시고 있습니까, 아니면 술이 당신을 마시고 있습니까. 저는 그 질문 앞에서 멈추게 됐습니다.

요약: 절제(Moderate Drinking)는 단순한 건강 규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통제하는 마지막 경계이며, 영화는 그 경계를 지킨 사람만이 진짜 자유를 얻는다고 말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어나더 라운드는 술을 예찬하는 영화인가요?

A. 아닙니다. 영화는 술 자체를 긍정하거나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술을 도구로 삼아 '선을 넘는 순간 무너진다'는 디오니소스 신화의 구조를 그대로 재현합니다. 적당한 술이 자신감을 줄 수 있지만, 그 선을 넘으면 결국 술이 사람을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이 영화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Q. 키에르케고르의 불안 철학이 영화에서 어떻게 나타나나요?

A.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을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자유를 향한 가능성의 신호로 봤습니다. 영화 속 마르틴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마지막에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데, 이것이 바로 불안을 자양분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키에르케고르적 성장입니다. 영화는 오프닝과 중반부에 키에르케고르를 직접 인용해 이 맥락을 분명히 합니다.

 

Q. 영화 제목 '어나더 라운드'는 무슨 뜻인가요?

A. 덴마크 원제는 '만취(Druk)'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영어 제목 'Another Round'는 술자리에서 '한 잔 더'라는 의미와 '다음 단계로 나아가라'는 이중적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원제보다 영화의 철학적 메시지까지 함축한 제목이라 저는 오히려 영어 제목이 더 어울린다고 느꼈습니다.

 

Q. 혈중알코올농도 0.05%는 어느 정도 취한 상태인가요?

A. 혈중알코올농도(BAC) 0.05%는 가볍게 한두 잔 마신 상태로, 긴장이 풀리고 기분이 약간 좋아지는 수준입니다. 운전은 불가능하지만 일상 대화나 업무에 지장이 없는 정도입니다. 영화 속 교사들이 이 수치를 목표로 삼은 것은 '취하지 않되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의도였으나, 결국 그 경계를 지키지 못하면서 실험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Q. 《어나더 라운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가요?

A. 실화를 그대로 옮긴 영화는 아닙니다. 다만 감독 토마스 빈터베르그는 덴마크 사회의 음주 문화와 중년의 위기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었으며, 영화에는 실제 덴마크의 졸업 축제 문화에서 영감을 받은 장면이 포함되어 있으며, 중년의 삶과 음주 문화에 대한 감독의 문제의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결론

《어나더 라운드》를 보고 나서 한 가지는 분명해졌습니다. 이 영화는 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스스로를 잃지 않는 선이 어디인지 묻는 영화입니다. 그 선은 혈중알코올농도 수치로 그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마지막 경계에서 그어집니다.

제 경험상 이건 술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이든 관계든 어느 순간부터 내가 그것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를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이 옵니다. 그 순간을 알아차리고 잔을 내려놓는 것, 어쩌면 그게 진짜 어른의 자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 제 기억에 남은 것은 술잔이 아니라, 결국 다시 일어나 춤을 추던 마르틴의 모습이었습니다.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뒤에도 다시 걸어갈 용기를 잃지 않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WRnwk4r7zh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