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직을 고민할 때 보통 연봉 협상력이나 커리어 개발을 이유로 듭니다. 그런데 저는 10년 가까이 한 회사에 다니다가 떠났고, 다시 돌아온 경험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건 하나였습니다. 사람들이 회사를 떠나는 진짜 이유는 숫자로 표현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채바퀴 같은 일상, 권태가 쌓이는 방식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퇴근하고, 다음 날 또 같은 시간에 눈을 뜨는 일상. 저는 그 패턴이 10년 가까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이상한 감정이 올라오는 걸 느꼈습니다. 회사가 특별히 나빴던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안정적인 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 한쪽이 계속 답답했습니다.
영화 《굿걸》의 저스틴이 떠오르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텍사스 로데오마트에서 반복적인 일상을 보내던 저스틴이 새로 들어온 직원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장면, 그게 단순한 불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권태에서 비롯된 탈출 욕구에 가깝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런 선택을 두고 "그냥 충동적인 거 아니냐"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조금 다르게 봅니다.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작은 자극에 반응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이라고 부릅니다. 번아웃 증후군이란 장기간의 스트레스로 인해 감정적, 신체적으로 소진된 상태를 뜻하며, 단순한 피로와 달리 동기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2019년 세계보건기구(WHO)는 번아웃을 공식 직업 현상으로 인정했습니다(출처: WHO). 저 역시 그때 제 상태가 번아웃이었다는 걸 한참 뒤에야 알았습니다. 당시에는 그냥 '회사가 싫은 건가'라고만 생각했으니까요.
제 사수가 면접 때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품질은 늘 외롭고, 늘 싸우고, 늘 힘들어." 그때는 겁을 주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품질 관리 업무를 하면서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생산팀, 개발팀, 거래처 사이에서 항상 중간자 역할을 해야 했고,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불려 가는 건 항상 저였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혼자라는 느낌이 반복됐습니다. 그 감정이 쌓이고 쌓인 결과가 결국 이직이었습니다.
이직 후 첫날, 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
일반적으로 이직을 하면 새로운 환경에서 빠르게 적응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같은 전자업계인데도 새로운 회사 첫날은 완전히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았습니다.
업무 방식이 달랐고, 사람들이 대화하는 방식도 달랐습니다. 예전 회사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알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회의 자리에서 어느 선까지 이야기해야 하는지, 어떤 팀장이 어떤 방식을 선호하는지,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를 먼저 찾아가야 하는지. 그런 암묵적인 조직 규범들을 저는 10년 동안 몸으로 익혀왔던 겁니다.
이것을 조직문화 용어로 암묵지(Tacit Knowledge)라고 합니다. 암묵지란 경험을 통해 체득한 지식으로, 문서나 매뉴얼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노하우를 뜻합니다. 경영학자 마이클 폴라니(Michael Polanyi)가 제시한 개념으로, 새로운 조직에 합류했을 때 가장 빠르게 체감되는 결핍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점심시간조차 어색했습니다. 누구랑 밥을 먹어야 하는지, 어느 식당을 가는지, 그런 것 하나하나가 낯설었습니다. 그 어색함이 몇 달을 이어졌고, 저는 그때서야 제가 잃어버린 것의 무게를 실감했습니다.
소속감이라는 것, 연봉표에 적히지 않는 가치
요즘 직장인 콘텐츠를 보면 이직을 마치 포트폴리오 최적화처럼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높은 연봉, 더 큰 브랜드, 더 빠른 성장.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한 가지가 빠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직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조직몰입도(Organizational Commitment)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조직몰입도란 구성원이 자신이 속한 조직에 대해 느끼는 심리적 유대감의 정도를 말하며, 단순한 만족도와는 구별됩니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이직을 경험한 직장인의 상당수가 새로운 조직에서 소속감 결핍을 주요 불만족 요인으로 꼽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한국노동연구원). 제가 딱 그 케이스였습니다.
이직 전후로 달라진 것들을 돌아보면 이렇습니다.
- 연봉: 올랐지만 체감 만족도는 오히려 낮아졌습니다.
- 업무 난이도: 비슷했지만 처리 속도는 느려졌습니다.
- 관계: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했습니다.
- 심리적 안정감: 예전 회사의 절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회사를 다니면서 우리는 월급만 받는 게 아닙니다. 관계를 만들고, 기억을 만들고, 그 안에서 제 자리를 만들어 갑니다. 10년 동안 쌓인 시간은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습니다. 제가 그걸 알게 된 건 그 무게를 내려놓고 나서였습니다.
다시 돌아간 선택이 실패인가, 아닌가
어느 날 예전 회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다시 올 생각 없어요?" 솔직히 자존심보다 안도감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저는 회사를 그리워한 게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온 제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걸.
일반적으로 이직 후 복귀를 실패한 선택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떠나봤기 때문에 알게 된 것들이 있었습니다. 떠나기 전에는 불평으로만 보이던 것들이 다시 보였고, 당연하게 여겼던 동료들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했는지도 알게 됐습니다.
영화 《굿걸》의 저스틴이 결국 남편 필과의 일상으로 돌아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봅니다. 그녀가 홀든과의 관계에서 찾으려 했던 것은 어쩌면 새로운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잃어버렸다고 느낀 의미였을 것입니다. 탈출구처럼 보였던 선택이 결국 또 다른 현실을 만났을 때, 그녀가 멈춘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제 경험상 이직을 고려할 때 가장 먼저 물어봐야 할 질문은 "더 좋은 회사가 있는가"가 아니라 "지금 내가 힘든 이유가 환경인가, 아니면 내 안에 있는가"입니다. 그 답이 명확하지 않다면 한 번쯤 더 천천히 생각해 볼 이유가 있습니다.
익숙함이 나태함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익숙함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 쌓인 신뢰와 경험의 무게가 바로 익숙함이기 때문입니다. 이직을 꿈꾸고 있다면, 그 꿈이 더 나은 곳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지금의 고통을 피하려는 것인지를 먼저 구분해 보시길 권합니다. 장소가 바뀐다고 인생이 바뀌는 건 아니라는 걸, 저는 직접 겪고 나서야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