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을 보기 전에는 갈등의 원인이 훨씬 분명한 이야기일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누군가는 상처를 주고, 지영은 그 안에서 버티는 식으로 말입니다. 막상 끝까지 보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지영 곁에는 무심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녀를 아끼고 도우려는 가족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저는 그런 장면에서 더 자주 멈추게 됐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머릿속에 남은 건 누군가의 차가운 말보다 "너를 생각해서"라는 따뜻한 말이었습니다.대현의 말에서 걸린 한 가지처음 대현을 봤을 때는 꽤 현실적인 남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내의 상태를 살피고 자신이 육아휴직을 쓰는 방법까지 고민합니다. 집안일과 육아를 전부 아내 몫으로 여기며 뒤로 빠지는 인물은 아닙니다.그래서 지영이 다시 일하려는 ..
《히든 피겨스》에서 제일 먼저 기억에 남은 건 우주선도, 복잡한 계산식도 아니었습니다. 사무실 한쪽에 따로 놓인 커피포트였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목표를 위해 일하는데 물 한 잔을 마시는 순간에도 선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상하게 그 작은 물건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천재보다 먼저 보인 커피포트 하나캐서린 존슨은 어려운 계산을 해내며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넓혀갑니다. 처음에는 그 과정이 통쾌했습니다. 자신을 제대로 보지 않던 사람들 앞에서 결국 실력으로 답을 보여주니까요.그런데 계속 보다 보니 마음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왜 캐서린은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증명한 뒤에야 같은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했을까.영화에서는 캐서린이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찾아 먼 거리를 오가는 모..
《레지던트 이블: 0번째 밤》을 보기 전에는 좀비보다 새로운 설정이 더 걱정됐습니다. 어릴 때부터 《바이오하자드》 게임을 접했고, 이후 나온 《레지던트 이블》 영화도 빠짐없이 봤습니다. 익숙한 인물들을 내려놓고 처음 보는 주인공으로 다시 시작한다니 기대보다는 경계하는 마음이 컸습니다.막상 영화를 보고 나니 예상은 반대로 갔습니다. 낯선 주인공을 따라가는 동안 오래전 게임기를 붙잡고 있던 때의 긴장감이 조금씩 살아났습니다. 강한 주인공이 사라지자 좀비가 다시 보였다브라이언은 의료품을 배달하는 사람입니다. 총을 능숙하게 다루는 것도 아니고 괴물과 맞설 훈련을 받은 인물도 아닙니다.이전 영화들을 전부 봐온 제게 이 변화는 생각보다 크게 다가왔습니다. 밀라 요보비치가 연기한 앨리스가 점점 강해질수록 좀비는 공포..
원작 《인턴》을 처음 봤을 때는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벤이 부러웠습니다. 회사에 저런 사람이 한 명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 최민식의 기호가 등장하는 한국판 《인턴》을 보고 나니 시선이 반대로 움직였습니다. 이번에는 좋은 선배를 찾기보다 지금의 제가 어떤 선배에 가까운지를 생각하게 됐습니다.이번에는 기호의 자리가 먼저 보였다기호는 출판사에서 30년 넘게 일한 뒤 패션 스타트업 우투에 실버 인턴으로 들어갑니다. 오랫동안 한 분야에서 일했지만 새로운 회사에서는 다시 막내입니다.메신저와 축약어가 익숙하고 AI까지 업무에 사용하는 직원들 사이에서 기호의 정장과 느린 말투는 금방 눈에 띕니다. 여기서 마음에 들었던 건 그가 젊은 직원들의 방식을 평가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저도 품..
어릴 때는 냉장고를 열면 할머니가 만든 김치가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집에서 먹던 반찬도 대부분 할머니 몫이었습니다. 특별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습니다. 늘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그 김치를 다시 먹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집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상하게 영화 속 음식보다 그 김치가 먼저 생각났습니다.밥상에서 가장 편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이준익 감독의 《아버지의 집밥》은 고리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합니다. 정진영이 남편 고하응을, 이정은이 아내 안순애를 연기하고 변요한이 아들 고명복으로 출연합니다. 2026년 9월 9일 롯데시네마에서 개봉했으며, 스마트폰처럼 세로로 긴 화면을 사용하는 독특한 작품입니다.하응은 오랫동안 순애가 차려주는 밥을 먹으며 살아왔습니다. 먹고 ..
GRS 대원들이 장비를 챙깁니다. 영사관은 이미 공격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출발하지 못합니다. 《13시간》에서 가장 답답했던 순간입니다. 화면만 보고 있으면 답은 쉬워 보입니다. 당장 가야 합니다. 다만 저는 이미 사건의 결과를 알고 그 장면을 보고 있었습니다.결과를 알고 보는 사람의 판단《13시간: 더 시크릿 솔저스 오브 벵가지》는 2012년 리비아 벵가지에서 발생한 미국 시설 공격을 바탕으로 합니다. 사건 전체를 설명하기보다 현장에 있던 GRS 대원들을 가까이 따라가는 영화입니다.대원들이 기다리는 몇 분은 길게 느껴집니다. 표정도 보이고 무전도 들립니다. 반면 왜 바로 출발할 수 없는지는 그만큼 가까이 보여주지 않습니다. 저도 어느 순간 대원들 편에서 “왜 아직도 안 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