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꽃 피는 봄이 오면 (냉소, 돌봄, 버팀)

by dailyroutine15 2026. 5. 25.

아침마다 외할머니 상태부터 확인합니다. 밤새 불편하신 곳은 없었는지 살피고, 기저귀 케어를 마친 뒤 허둥지둥 출근합니다. 퇴근 후에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어머니와 함께 외할머니를 챙기다 보면 하루가 금방 끝납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 보면 이상하게도 “열심히 살고 있다”는 느낌보다 “그냥 버티고 있다”는 감각이 더 강해집니다.

저는 그 시기에 꽃피는 봄이 오면을 다시 봤습니다. 예전에는 단순히 실패한 음악가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르게 보였습니다. 특히 주인공 현우의 냉소와 무기력이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냉소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처음 현우를 봤을 때는 그냥 고집스럽고 답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트럼펫 연주자를 꿈꾸다 음악 학원 강사로 전전하는 사람, 친구의 성공을 깎아내리며 "나는 진짜 예술을 한다"는 식의 위안으로 버티는 사람. 처음엔 공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딱 저였습니다. 저도 "해야지" 하고 마음만 먹다가 외할머니 돌봄과 생활비 현실이 계속 밀려오면서 언제부터인가 꿈 얘기를 꺼내기가 부끄러워졌거든요. 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이라고 부릅니다. 학습된 무력감이란, 반복적인 실패나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지속될 때 "어차피 안 된다"는 생각이 몸에 새겨지는 현상입니다. 현우의 냉소는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오래 버텨온 사람이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다.

번아웃(burnout)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번아웃이란 지속적인 스트레스와 소진으로 인해 감정적·신체적·정신적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9년 번아웃을 공식 질병 분류에 포함시켰을 만큼, 이건 의지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입니다(출처: 세계보건기구(WHO)). 현우가 대회에 나가는 학생들을 보며 "쟤들은 자기가 다 훌륭한 연주자가 될 줄 안다"라고 비웃는 장면이 있는데, 저는 그 장면에서 웃지 못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은 과거의 자신에게 던지는 말이라는 걸 알아서요.

돌봄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가

제가 직접 겪어봤는데, 가족 돌봄이 길어지면 가장 먼저 달라지는 건 시간 감각입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는데, 그렇다고 무언가를 한 것 같지도 않은 상태. 퇴근 후 돌봄이 이어지고, 어머니랑 같이 외할머니를 챙기고 나면 하루가 그냥 끝나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국내 비공식 돌봄 제공자, 즉 가족 중 누군가를 직접 돌보는 사람의 수는 상당한 규모로 추정되며, 이들 중 상당수가 심리적 소진을 경험한다고 보고됩니다(출처: 보건복지부). 돌봄 제공자의 소진 문제는 오래전부터 사회적 과제로 제기돼 왔지만, 정작 당사자는 "대단하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속으로는 그냥 해야 하니까 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현우가 시골 중학교 관악부 지도 교사로 내려간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습니다. 자포자기에 가까운 선택이었지만, 그 공간에서 그는 처음으로 타인의 돌봄을 받게 됩니다. 제일의 할머니가 돈도 없는 낯선 사람에게 떡을 그냥 가져가라고 한 장면, 저는 그 장면이 꽤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돌봄을 주기만 하다가 받는 순간이 얼마나 낯설고 또 고마운지를, 제 경험상 이건 직접 겪어봐야 압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주변에서는 “쉽지 않겠다”라고 말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선택지가 많지 않습니다. 결국 해야 하니까 움직이는 날들이 더 많습니다.

저 역시 가족 병원 문제를 겪으며 느꼈습니다. 사람은 몸이 아픈 것도 힘들지만, 돈 걱정이 겹치는 순간 마음이 더 빨리 무너집니다. 그래서 현우가 친구 앞에서 자존심 내려놓고 연주하며 병원비를 구하는 장면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버팀의 실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하게 된 장면은 용석의 아버지와의 대화였습니다. "꿈을 꾼다고 다 이루어지냐"는 그 말이 틀리지 않았고, 현우도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연희가 떠난 것도 결국 그 현실을 현우가 외면했기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는 현실이 정답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용석이 아버지 앞에서 관악부 전원이 연주하는 장면, 말로 안 되는 걸 음악으로 건드리는 그 방식. 저는 그게 설득이 아니라 공명(resonance)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명이란 원래 물리학 용어로, 외부 자극의 진동수가 물체의 고유 진동수와 일치할 때 진폭이 커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논리로 닫힌 마음이 감정의 주파수가 맞는 순간에 열리는 것, 그게 그 장면이었습니다.

버팀이라는 것의 실체가 뭔지 생각해 봤습니다. 저한테는 이렇습니다.

  • 고양이 바론이랑 쿠키가 퇴근한 저 옆에 와서 놀아달라고 하고 또는 그냥 누워 있는 것
  • 어머니가 아무 말 없이 밥을 챙겨주시는 것
  • 외할머니가 잠깐이라도 편하게 주무시는 모습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이 아주 작고 단순한 것들이 사람을 오래 버티게 만든다는 걸, 제 경험상 이건 진짜입니다. 현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학생들이 "우승하려고 하냐"는 질문에 "연주하고 싶어서요"라고 답하는 장면에서, 그는 다시 음악 자체를 보기 시작합니다. 수단이 아니라 이유로서의 음악.

봄이 오는 방식

영화 제목이 꽃 피는 봄이 오면인 건 꽤 영리한 선택이라고 봤습니다. 봄이 "왔다"가 아니라 "오면"입니다. 아직 도달하지 않은 시제. 하지만 반드시 온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수연이 현우에게 "봄이 오긴 오더라고요. 그냥 오고 가고 그러는 거 같아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픈 아버지를 모시고 혼자 버티고 있는 사람이 그 말을 할 때, 이건 위로가 아니라 증언이었습니다. 제가 이 장면에서 잠깐 멈춰야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저도 지금 겨울 같은 시간 안에 있고, 그 말이 어딘가 닿았기 때문입니다.

정서적 회복 탄력성(resilience)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회복 탄력성이란 역경이나 스트레스를 경험한 후 다시 이전 상태로 되돌아오거나 더 성장하는 심리적 능력을 말합니다. 이게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경험과 관계를 통해 길러진다는 것이 현재 심리학의 주류 견해입니다. 현우가 회복된 건 오디션에 합격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제일의 트럼펫 소리를 다시 듣고, 학생들의 연주 앞에 서고, 처음으로 어머니께 용돈을 드리고 나서였습니다. 작은 연결들이 쌓이면서 마음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쳐서 방향을 잃은 느낌이 드는 시기라면, 이 영화를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답을 주는 영화가 아닙니다. 다만 비슷한 겨울을 버텨온 사람이 "봄은 옵니다"라고 조용히 말해주는 영화입니다. 저는 그 말이 지금 꽤 필요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9DJTRLwJFpo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