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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렛지 (클라이밍 기술, 생존 심리, 무관심)

by dailyroutine15 2026. 6. 8.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클라이밍을 특별한 사람들의 취미라고 생각했습니다. 체력이 좋거나 운동을 오래 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운동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여자친구와 실내 데이트 장소를 찾다가 클라이밍을 접했고, 약 1년 동안 배우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영화 《더 렛지》를 봤을 때 단순히 절벽에 매달린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각자의 벽을 오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절벽 한가운데서 드러나는 클라이밍 기술의 민낯

영화 속 캘리는 안전 장비조차 없이 수직에 가까운 절벽을 오릅니다. 클라이밍을 직접 해본 사람이라면 이게 얼마나 극한의 상황인지 바로 느낄 수 있습니다. 실내 클라이밍에서 기본 중의 기본으로 배우는 것이 바로 루트 리딩(Route Reading)입니다. 루트 리딩이란 실제로 벽을 오르기 전에 어떤 홀드를 어떤 순서로 잡을지, 발을 어디에 딛을지 시각적으로 미리 분석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이게 왜 필요한지 몰랐습니다. 그냥 올라가면 되는 거 아닌가 싶었거든요. 결과는 매번 중간에서 추락이었습니다.

제가 클라이밍을 처음 시작한 건 여자친구와 실내 클라이밍 체험을 간 게 계기였습니다. 처음 몇 번은 코치가 "처음 맞으세요?"라고 물어볼 정도로 반응이 좋았는데, 자신감이 붙자마자 바로 벽이 저를 현실로 돌려놓았습니다. 3개월 다닌 여성 회원이 깔끔하게 완등하는 걸 보고 "나도 하면 되겠다"라고 생각했다가 같은 코스에서 다섯 번 넘게 떨어졌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상하게 계속 그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사실 자존심이 상했던 겁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사람은 실패해서 성장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착각이 깨질 때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사회도 비슷합니다. SNS를 보면 다들 잘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성공한 사람 이야기, 돈 번 이야기, 여행 간 이야기만 넘쳐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패를 반복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과정은 보여주지 않고 결과만 보여주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괜히 스스로를 부족하게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영화 속 캘리 역시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무섭고, 흔들리고, 실수합니다.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클라이밍에서 온사이트(Onsight)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온사이트란 사전 연습이나 정보 없이 처음 보는 루트를 단 한 번에 완등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직접 해봐야 압니다. 국내 클라이밍 선수들도 대회에서 온사이트 성공률이 높지 않습니다.

영화 속 캘리의 탈출이 설득력 있는 이유는 그녀가 단순히 힘이 세서가 아닙니다.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 발 스미어링(Smearing) 기술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생사를 가릅니다. 발 스미어링이란 홀드(손잡이나 발판)가 없는 평평한 벽면에 신발 밑창 마찰력만으로 체중을 지지하는 기술입니다. 제가 실제로 해본 경험상 이건 처음에는 거의 본능적으로 거부하게 됩니다. 발을 믿어야 하는데 발이 믿어지질 않으니까요. 영화는 바로 그 순간의 공포를 아주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스포츠클라이밍은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국내 등록 클라이밍 인구는 2023년 기준 약 100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됩니다(출처: 대한산악연맹). 클라이밍이 단순한 익스트림 스포츠가 아니라 전략과 체력, 심리가 결합된 복합 스포츠로 인정받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강한 자가 아니라 끝까지 버틴 자가 살아남는다

영화 속 악당 조쉬는 체격도 좋고 인원도 많습니다. 반면 캘리는 절벽 한가운데서 혼자 고립됩니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살아남는 건 캘리입니다. 저는 이 결말을 보면서 의외로 클라이밍 체육관에서 봐왔던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클라이밍 체육관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에 주목받는 사람과 오래 살아남는 사람입니다. 운동신경이 좋아서 초반에 빠르게 올라가던 사람들이 몇 달 안에 그만두는 경우를 여러 번 봤습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5급 루트에서도 쩔쩔매던 사람이 1년, 2년 지나면 어느새 코치급 실력이 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클라이밍에서는 이걸 레드포인트(Redpoint) 정신이라고 부릅니다. 레드포인트란 과거에 실패했던 루트를 충분한 연습 끝에 완등해 내는 것을 의미하며, 단순한 성공이 아니라 실패를 거듭하면서 포기하지 않는 과정 자체를 가리킵니다.

영화 속 캘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체격이 가장 좋은 사람도 아니고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왜 그럴까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요즘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외할머니를 돌보던 시간, 부모님 걱정, 집안일, 직장 생활까지 겹치다 보면 가끔은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친구들은 여행을 가고 취미생활을 즐기는데 저는 집에 들어가야 하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솔직히 부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결국 다음 날 또 일어나 해야 할 일을 합니다. 특별히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해야 하니까 하는 것입니다.

제가 품질 관련 업무를 하면서도 비슷한 걸 느꼈습니다. 프로세스가 정착되기까지는 수없이 지적받고, 수정하고, 다시 처음부터 검토하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누군가는 결과만 보고 "그게 뭐가 어렵냐"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벽을 한 번도 올라보지 않은 사람이 가장 쉽게 이야기한다는 걸, 그때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오히려 그런 평범한 버팀이 더 강한 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절벽보다 무서운 건 사람이고, 더 무서운 건 무관심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절벽이 무섭다고 말합니다. 저는 조금 다르게 느꼈습니다. 진짜 무서운 건 절벽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영화 속 비극도 결국 사람 때문에 시작됩니다. 절벽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뉴스를 보면 사고보다 더 자주 보이는 것이 사람의 욕심, 무책임함, 그리고 무관심입니다. 누군가는 힘들다고 신호를 보내는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도움을 요청하지만 다들 바쁘다는 이유로 지나칩니다. 저 역시 힘든 시기에 "괜찮냐"는 한마디가 정말 크게 느껴졌던 적이 있습니다. 반대로 가장 힘들 때 아무도 묻지 않는 순간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결국 사람을 살리는 것도 사람이고 무너뜨리는 것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더 렛지》는 단순한 생존 스릴러가 아닙니다. 절벽에 매달린 한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모두가 각자의 벽을 오르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가장 오래 남은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인생은 정상에 가장 빨리 도착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 아니라, 떨어져도 다시 손을 뻗는 사람이 끝까지 살아남는 과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6NZwAG1SZ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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