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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케르크》를 두 번째로 봤을 때 이상하게 토미도 파리어도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자꾸 눈이 갔습니다. 처음 볼 때는 배경처럼 지나쳤던 인물, 방파제 위에서 쌍안경을 들고 서 있던 지휘관 볼턴이었습니다. 케네스 브래너가 연기한 그는 대사도 많지 않고 화면에 오래 머물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이 영화에서 가장 무거운 질문을 들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습니다. 책임진다는 건 정확히 언제까지를 말하는 걸까요.
방파제 위에서 순서를 정하는 사람
볼턴은 총을 쏘지도, 물에 빠지지도, 폭격을 피해 뛰어다니지도 않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방파제 위에 서서 어느 부대를 먼저 태울지, 부상병을 어디에 실을지, 밀려드는 병력을 어떻게 통제할지를 계속 판단하는 것입니다.
처음 볼 때는 이런 장면들이 토미의 탈출이나 파리어의 공중전 사이에 잠깐 들어가는 연결 장면처럼 보였습니다. 두 번째에는 조금 달랐습니다. 직접 싸우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누군가의 순서를 정해야 하는 사람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누구를 먼저 살릴지 판단하는 일에는 멋진 영웅의 그림이 따라붙지 않습니다. 볼턴은 대부분 서 있고, 바라보고, 판단합니다. 화려한 장면은 아니지만 다시 보니 그 조용한 일이 영화 속 어떤 전투 못지않게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한 자리의 차이일 뿐이지만, 그곳에서는 그 순서가 생사를 가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수평선에 작은 점들이 나타나는 장면도 두 번째 관람에서는 다르게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민간 선박들이 등장하는 유명한 장면 자체에 눈이 갔다면, 이번에는 그 배들을 바라보는 볼턴의 얼굴을 더 오래 보게 됐습니다.
그의 표정은 생각보다 크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가 기뻐하기 전에 다시 숫자를 세기 시작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줄어드는 배와 좀처럼 줄지 않는 병력 사이에서 버텨온 사람에게 수평선의 작은 배들은 감동이면서 동시에 계산을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변수였을 겁니다.
물론 영화가 볼턴의 속마음을 직접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두 번째로 보면서 제가 받은 인상입니다. 첫 관람에서는 작은 배들이 보였는데, 이번에는 그 배들을 바라보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같은 장면인데 시선이 머무는 곳이 달라지니 전혀 다른 장면처럼 느껴졌습니다.
자기 차례가 왔는데도 남는 사람
철수가 막바지에 이르면 볼턴에게도 떠날 기회가 생깁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승선하지 못한 프랑스 병사들을 마저 철수시키겠다며 방파제에 남습니다. 이 장면이 좋았던 건 그의 선택을 영화가 크게 포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긴 연설도 없고 자신의 희생을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그냥 남습니다. 저는 이때 영화 초반부터 이어지던 볼턴의 행동이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에게 책임은 영국 병사들이 어느 정도 빠져나갔다고 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었던 겁니다.
이미 충분히 버텼고 이제 돌아가도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사람이 자기 순서를 뒤로 미룹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장면이 화려한 공중전보다 오래 남았습니다. 책임이라는 게 거창한 희생보다 어쩌면 내 차례가 왔는데도 아직 일이 남아 있다는 것을 외면하지 않는 데서 시작되는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 볼턴이 지키던 방파제에 대해서도 찾아봤습니다. 실제 됭케르크 철수에서 이곳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었습니다. English Heritage 기록을 보면 철수 인원의 3분의 2 이상이 해변이 아니라 방파제, 즉 몰을 통해 빠져나갔습니다. 영화에서 볼턴이 계속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이유가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그곳에서 승선을 조직했던 실제 인물 가운데 제임스 캠벨 클루스턴이 있었습니다.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의 영국 왕립해군 장교였던 그는 됭케르크에서 피어마스터로 승선 작업을 지휘했습니다. 볼턴이 클루스턴 한 사람을 그대로 옮긴 인물은 아닙니다. 케네스 브래너의 설명처럼 볼턴은 당시 여러 실제 인물을 합쳐 만든 캐릭터입니다. 그중 클루스턴은 볼턴을 구성하는 데 참고한 주요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니 볼턴을 보는 마음도 조금 달라졌습니다. 영화에서는 여러 사람의 역할이 한 명의 지휘관에게 모였지만 실제 방파제에는 각자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볼턴에게 감탄할수록 오히려 화면 밖에서 그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런데 볼턴은 너무 흔들리지 않는다
볼턴을 두 번째로 보면서 좋아진 부분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한 가지 위화감도 더 선명해졌습니다. 볼턴은 영화 내내 지나치다 싶을 만큼 흔들리지 않습니다.
토미와 알렉스는 살기 위해 새치기를 하고, 도망칠 방법을 찾고, 말없는 동료를 독일군 스파이로 의심합니다. 《덩케르크》는 두려움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쉽게 비겁해질 수 있는지를 굳이 감추지 않습니다. 그런데 볼턴에게는 그런 흔들림이 거의 없습니다. 상황이 악화돼도 침착하고, 병사들을 챙기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귀환까지 뒤로 미룹니다.
물론 이 영화가 지휘부의 정치적 갈등이나 철수 작전의 모든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려는 작품은 아닙니다. 볼턴 역시 여러 실제 인물의 역할을 한 사람에게 압축한 캐릭터이니, 그의 역할을 단순하고 분명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는 반론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래도 저는 그가 한 번쯤 흔들렸으면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자신도 돌아가고 싶다는 표정이 잠깐이라도 보였거나 어떤 판단 앞에서 망설였다면, 마지막에 남겠다는 결정이 지금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끝까지 남는 것보다 떠나고 싶은 사람이 결국 남는 쪽을 선택하는 모습이 제가 생각하는 책임에는 조금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덩케르크》를 처음 봤을 때는 파리어가 연료가 떨어진 스핏파이어를 불태우는 장면과 토미가 기차 안에서 신문에 실린 처칠의 연설을 읽는 장면이 오래 남았습니다. 두 번째에는 달랐습니다. 새벽빛 속에서 텅 비어 가는 해변을 바라보던 볼턴의 모습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토미는 영국으로 돌아가고 파리어는 적진에 남아 포로가 됩니다. 다른 인물들도 각자의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이야기가 끝납니다. 그런데 볼턴만은 그들과 함께 떠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관람에서는 살아 돌아간 사람들이 보였다면, 이번에는 그 사람들이 돌아갈 수 있도록 끝까지 자리를 비우지 않은 사람이 보였습니다. 책임이 언제 끝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볼턴에게는 적어도 자신의 배가 도착한 순간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모두가 떠난 뒤에도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