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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에서 사라진 선택

dailyroutine15 2026. 8. 25. 11:43

목차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

    새 회사에서 처음 작성한 보고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앉기를 반복했습니다. 이전 회사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누구에게 먼저 알리고 어떤 자료를 준비해야 하는지 몸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보고서 내용보다 보고 순서가 더 어려웠습니다. 그때 몇 달 뒤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이 망설임도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2020년 공개된 일본 SF 코미디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은 바로 그 상상을 2분이라는 짧은 시간 차이로 보여줍니다. 미래를 먼저 알게 되면 사람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미 본 장면을 따라가며 현재를 잃게 될까요.



    보고서를 들고일어나지 못했던 이유

    경력자로 새 회사에 들어갔지만 모든 것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됐습니다. 같은 품질 문제라도 보고해야 할 사람이 달랐고, 자료를 공유하는 순서도 이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바로 팀장에게 가도 되는지, 중간 담당자를 먼저 거쳐야 하는지조차 확신하기 어려웠습니다.

    질문하면 금방 해결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경력자가 이런 것까지 묻느냐는 시선이 신경 쓰였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앉은 이유는 보고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제가 그 조직의 방식을 아직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미래의 제가 모니터에 나타나 “너는 결국 이전 회사로 돌아가게 된다”라고 알려줬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편해졌을 것입니다. 적응이 늦어도 제 능력 전체가 부족한 것은 아니라고 받아들였을 테니까요.

    하지만 복귀할 미래를 확인한 순간부터 새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은 모두 임시가 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동료들과 가까워질 이유도, 낯선 보고 방식을 끝까지 배울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실수했을 때 원인을 돌아보기보다 “나는 어차피 돌아갈 사람”이라는 말로 넘겼을지도 모릅니다.

    먼저 짚어보기: 미래는 불안을 줄여줄 수 있지만, 현재를 대충 살아도 된다는 핑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2분 뒤의 나는 정답을 알고 있을까

    카페를 운영하는 카토는 일을 마치고 위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갑니다. 그곳에서 모니터 속 자신과 마주칩니다. 화면에 나타난 카토는 지금보다 2분 뒤에 있는 자신이었고, 두 사람은 서로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잃어버린 기타 피크의 위치를 확인하는 정도로 시작합니다. 친구들이 모이면서 활용법은 빠르게 달라집니다. 즉석복권의 결과를 알아보고, 돈을 벌 방법을 궁리합니다. 저라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미래를 볼 수 있게 됐을 때 삶의 의미보다 손해를 피하고 이익을 얻는 방법부터 계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영화 속 미래는 정답지가 아닙니다. 모니터에서 본 장면이 나타나면 인물들은 그 장면이 실제로 일어나도록 행동합니다.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 같지만, 점점 미래가 요구하는 동작을 재현하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카토가 이 상황을 불편해하는 이유도 이해됐습니다. 미래가 보이기 전에는 무엇을 할지 자신이 정할 수 있었습니다. 미래를 확인한 뒤에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보다 “화면에서 무엇을 봤는가”가 행동의 기준이 됩니다. 미래를 더 많이 볼수록 선택지는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좁아집니다.

    제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복귀한다는 결과를 알았다면 새 회사에서 실수할 가능성은 조금 줄었을지 모릅니다. 대신 보고서를 들고 사람에게 묻고, 틀린 순서를 고치고, 다른 조직의 방식을 배우는 과정까지 피했을 것입니다. 미래의 정보는 실패를 줄일 수 있지만, 실패를 통해 자신을 수정할 기회도 함께 줄일 수 있습니다.

    멀리 볼수록 더 잘 살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은 2분 뒤를 보여주는 모니터 두 대를 서로 마주 보게 합니다. 한 화면 속에 또 다른 화면이 들어가면서 4분 뒤, 6분 뒤의 장면이 겹겹이 이어집니다. 영화 제목에 쓰인 드로스테 효과는 이미지 안에 같은 이미지가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상을 뜻합니다. 마주 세운 두 거울 속에 반사된 모습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더 먼 미래가 보이는데도 인물들의 통제력은 커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미래를 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르고, 이해하는 것과 바꾸는 것 역시 다릅니다. 화면의 깊이는 계속 늘어나지만 사람들은 그 안에 나타난 결과에 더 끌려다닙니다.

    영화는 여러 촬영 구간을 자연스럽게 이어 약 70분 동안 한 번도 끊기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만든 의사 원테이크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카메라가 카페와 위층 방을 오가는 동안 관객도 인물들과 같은 시간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제게는 이 방식이 현재에서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 장치처럼 느껴졌습니다.

    미래의 장면을 먼저 보여주고 정확히 2분 뒤 그 행동을 다시 반복하는 구조도 재미있습니다. 같은 장면인데 처음에는 결과로 보였던 행동이 두 번째에는 원인이 됩니다. 영화가 복잡한 시간 이론을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가 보고 있는 현재가 다음 미래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현재에 충실하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영화의 밝고 유쾌한 분위기에는 동의하지만,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현재를 살면 된다”는 생각을 모든 현실에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맞지 않는 조직에서 성실하게 버틴다고 구조적인 문제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노력만으로 바꿀 수 없는 관계도 있고, 계속 남는 것보다 떠나는 선택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일 때도 있습니다.

    저 역시 이전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고 새 회사에서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왔다고만 정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다시 배워야 했던 부분도 있었지만, 개인의 적응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차이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생각하면 카토의 용기와 현재의 선택을 강조하는 결말은 조금 깔끔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영화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다만 미래를 확정된 결과처럼 받아들이는 순간 현재를 포기하게 된다는 생각에는 동의합니다. 복귀할 것을 미리 알았더라도 새 회사에서 보내야 할 하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달라지는 것은 하루의 길이가 아니라 그 시간을 대하는 제 태도였을 것입니다. 어차피 떠날 곳이라고 생각했다면 저는 그곳에서 배울 수 있었던 것까지 먼저 포기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관람 후 궁금했던 두 가지

    Q.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은 실제 원테이크 영화인가요?

    A.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촬영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 구간으로 촬영한 영상을 연결해 약 70분 동안 하나의 장면이 이어지는 것처럼 완성한 작품입니다. 촬영이 끊긴 지점을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연결돼 있습니다.

    Q. 드로스테 효과는 무엇인가요?

    A. 하나의 이미지 안에 같은 이미지가 반복해서 들어가는 시각적 현상입니다. 영화에서는 2분 뒤를 보여주는 두 모니터를 마주 세워 더 먼 미래가 화면 안쪽으로 계속 이어지는 구조로 활용합니다.

    복귀할 미래를 몰랐기에 남은 것

    결과를 몰랐기 때문에 저는 보고서를 들고 오래 서 있었습니다. 결국 사람에게 물었고, 틀린 순서를 고쳤으며, 익숙했던 제 방식이 모든 조직의 정답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당시에는 그 시간이 실패처럼 느껴졌지만 돌아보면 경력이 쌓여도 다시 질문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을 인정한 시간이었습니다.

    미래의 제가 복귀를 알려줬다면 불안은 조금 줄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낯선 책상 앞에서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끝까지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결과를 먼저 알고 시작하는 하루는 안전할 수 있지만, 그 안에서 내린 선택까지 온전히 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미래를 모르는 편에 조금 더 마음이 갑니다. 미래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의 행동을 제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을 보고 난 뒤에도 가장 오래 남은 것은 먼 미래의 화면이 아니었습니다. 보고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날지 말지 망설이던,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작품 한눈에 보기: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은 2020년 제작된 일본 SF 코미디 영화입니다. 작성 시점 로튼토마토 토마토미터는 평론 69개 기준 99%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점수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작은 공간과 2분이라는 짧은 시간 차이만으로 이야기를 끝까지 확장한 방식입니다.

    영화 공식 홈페이지 · 로튼토마토 작품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