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라스트 송 (아버지와 화해, 이해, 후회)

by dailyroutine15 2026. 6. 12.

학창 시절 저는 집에 들어가면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거실에는 아버지가 계셨지만 대화는 거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라스트 송》 속 로니가 아버지를 외면하는 장면을 보며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화해: 상처가 먼저냐, 이해가 먼저냐

가족이라는 이름이 항상 따뜻하지만은 않다는 걸, 저는 꽤 일찍 배웠습니다. 《라스트 송》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로니의 첫사랑도 아니고 바다거북도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그 싸늘한 눈빛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그 장면에서 영화를 본 게 아니라 제 학창 시절을 다시 본 것 같았습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가 강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강한 사람이 아니라 무너지는 방법을 몰랐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집도 어느 순간부터 대화가 사라졌습니다.

사업 실패 이후 아버지는 술을 가까이하기 시작했고, 가족들은 그런 아버지를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먼저 시작한 건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다만 기억나는 건 저녁 식탁의 침묵입니다. TV 소리만 들리고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던 시간.

지금 생각하면 그게 우리 가족이 무너지는 소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속 로니가 아버지를 밀어내는 이유를 보면서 이상할 정도로 화가 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해가 됐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은 대개 상대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또 상처받을까 봐 먼저 거리를 두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태를 정서적 단절(emotional detachment)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정서적 단절이란 가족 간에 물리적으로는 함께 있지만 감정적 교류가 단절된 상태를 의미하며, 장기화될 경우 애착 형성 자체에 손상을 줄 수 있습니다. 국내 청소년 정신건강 연구에서도 부모의 정서적 가용성, 쉽게 말해 부모가 자녀의 감정에 얼마나 반응해 주느냐가 자녀의 심리 발달에 핵심 변수로 꼽힙니다(출처: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영화에서 아버지와의 갈등이 복잡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이혼이라는 사건 자체보다 그 이후 이어진 단절의 시간이 더 큰 상처가 됩니다.
  • 아버지가 보낸 수많은 편지가 반송된 것처럼, 표현의 시도가 전달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됩니다.
  • 죽음이라는 시한이 주어졌을 때 비로소 서로가 솔직해지는데, 현실에서는 그런 계기가 오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해는 되지만 용서가 되지는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하게 됐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실패가 얼마나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지 알게 됐고, 책임감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거운지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사업 실패 후 술에 의존했던 아버지의 마음도 예전보다는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이해와 용서는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합니다."부모도 힘들었겠지."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도 합니다."그때의 나는 안 힘들었나?"

우리 사회는 유독 부모의 희생만 이야기합니다. 가족을 위해 고생했다는 말은 수없이 듣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받은 자녀들의 이야기는 잘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게 늘 아쉬웠습니다. 아버지가 힘들었던 것과 제가 외로웠던 것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사실인데 말입니다.

누군가의 고생이 다른 누군가의 상처를 없애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저는 아버지를 완전히 용서했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솔직히 지금도 사이가 탐탁지 않습니다. 같은 집에 있어도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 않습니다. 가끔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가끔은 굳이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영화처럼 눈물 흘리며 화해하는 장면은 현실에 거의 없습니다. 현실의 가족은 생각보다 훨씬 서툴고 복잡합니다.

가장 무서운 건 후회다

《라스트 송》 후반부에서 가장 아팠던 건 아버지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로니가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도 시간이 정해져 있다면 지금처럼 살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지금도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색합니다. 서로를 모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습니다. 좋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나쁘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관계.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가족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나이가 들수록 한 가지는 분명해졌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던 만큼, 아버지도 저를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서툴렀던 것뿐인지도 모릅니다.《라스트 송》은 제게 감동적인 영화가 아니라 불편한 영화였습니다.

보고 나서 눈물이 난 이유도 슬퍼서가 아니라 외면하고 있던 감정을 마주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아버지와 사이가 좋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아마 내일 갑자기 좋아지지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무조건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가족이라는 건 사랑해서 가까운 관계가 아니라,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겨우 이어지는 관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도 그 과정을 지나가는 중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S9AP0GWuCGo


소개 및 문의 · 개인정보처리방침 · 면책조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