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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킷 리스트 (죽음, 돌봄 번아웃, 삶의 의미)

by dailyroutine15 2026. 5. 26.

하루가 끝날 무렵, 오늘도 내가 원하는 걸 하나도 못 했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 있습니다. 밥 먹고, 일 하고, 가족 챙기고, 눕는 것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나중에 하지"가 입버릇이 되어 있었습니다. 영화 <버킷 리스트>를 보면서 그 감각이 선명하게 되살아났습니다. 죽음을 앞둔 두 남자의 이야기지만, 저는 오히려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읽혔습니다.

죽음이 준 자유, 버킷 리스트의 탄생

영화의 두 주인공은 서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한 명은 병원 재벌로 수십 년간 일에 매몰되어 살았고, 다른 한 명은 가족을 위해 꿈을 일찌감치 접었습니다. 그런데 병실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이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둘 다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인생을 뒤로 미루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버킷 리스트(Bucket List)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을 뜻합니다. 영어권에서 "kick the bucket"이라는 숙어가 죽음을 뜻하는 데서 유래했습니다. 쉽게 말해, 생의 마감 전에 남겨두고 싶지 않은 일들을 적어놓은 개인의 소망 목록입니다.

저도 솔직히 비슷한 종이 한 장을 머릿속에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적어보라고 하면 뭘 써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가족 돌봄을 오래 하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영화 속 인물이 종이를 꺼냈을 때 손이 멈추는 장면이 그래서 더 와닿았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나서야 살고 싶어 진다"는 말을 클리셰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게 클리셰가 아니라 대부분의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장 오늘을 버텨야 하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말은 너무 가볍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버텨내는 동안 서서히 사라지는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가족이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는 말을 오래 듣다 보면, 어느 순간 힘들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눈치 보일 때가 있습니다. 저 역시 처음에는 잠깐만 버티면 괜찮아질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돌봄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끝이 잘 보이지 않는 생활에 가까웠습니다. 하루 정도는 견딜 수 있는데, 그 하루가 몇 년 반복되면 사람 마음이 조금씩 닳아갑니다.

특히 무서웠던 건 감정이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음악 듣는 걸 좋아했고, 혼자 카페 가는 시간도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쉬는 날이 와도 그냥 멍하게 누워만 있었습니다. 몸이 피곤한 게 아니라, 뭘 해야 내가 즐거운 사람인지조차 잘 모르겠는 느낌이었습니다.

돌봄 번아웃, 조용히 닳아가는 감정

가족 돌봄을 해본 분이라면 아마 이 감각을 알 것입니다. 하루 종일 붙어 있었는데도 밤이 되면 혼자인 기분. 아침부터 기저귀 케어, 약 관리, 식사 준비, 상태 확인이 이어지고, 퇴근 후에도 돌봄은 계속됩니다. 그렇게 몇 달이 쌓이면 사람을 "함께하는 존재"가 아니라 "처리해야 할 일"로 바라보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이것을 돌봄 번아웃(Caregiver Burnout)이라고 합니다. 돌봄 번아웃이란 장기간 타인을 돌보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신체적·정서적으로 소진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단순한 피로와는 다르게, 돌봄 번아웃은 감정이 무뎌지고 무기력감이 만성화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실제로 국내에서 가족을 직접 돌보는 비공식 돌봄자 수는 약 165만 명 이상으로 추산됩니다(출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이 중 상당수가 돌봄 부담으로 인한 우울 증상이나 정서 소진을 경험한다고 보고됩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가장 무서운 건 무너지는 게 아니었습니다. 조용히 익숙해지는 과정이었습니다. 힘들다고 말하면 분위기가 무거워질 것 같아서 그냥 괜찮은 척 넘겼고, 그게 반복되니까 저 스스로도 "원래 이런 거다"라고 여기게 되더라고요. 영화 속 인물들이 농담을 던지면서도 눈빛이 텅 비어 있던 이유를 그래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진짜 지친 사람은 울거나 화내지 않습니다. 평소처럼 행동하면서 속에서만 계속 뭔가 닳아갑니다.

돌봄 번아웃을 단순히 개인의 의지 문제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 시각이 불편했습니다. 사회는 열심히 버티는 사람을 쉽게 "책임감 있다"라고 칭찬하면서도, 그 사람이 얼마나 소진되어 있는지는 깊게 들여다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돌봄은 사랑만으로 감당하기엔 너무 긴 현실입니다.

삶의 의미, 두 가지 질문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는 두 남자가 이집트 피라미드 꼭대기에 앉아 나누는 대화입니다. 고대 이집트 신화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신 앞에서 두 가지 질문을 받는다고 합니다.

  • "당신은 살면서 기쁨을 찾았습니까?"
  • "당신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었습니까?"

이 두 질문은 단순해 보이지만, 저는 이것이 이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의 전부라고 느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장면을 "감동적인 명대사"로 소비하고 넘어가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두 질문이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기쁨"이라는 단어가 너무 낯설어진 시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의미에 관한 연구에서는 주관적 웰빙(Subjective Well-being)이 핵심 개념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주관적 웰빙이란 개인이 자신의 삶에 대해 느끼는 만족감과 긍정적 감정의 총합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외부 조건이 아니라 내가 지금 내 삶을 어떻게 느끼느냐의 문제입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정신 건강을 "단순히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삶의 스트레스에 대처하며,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상태"로 정의합니다(출처: 세계보건기구(WHO)). 이 정의에 비추어 보면, 살아 있어도 자기 삶에서 기쁨을 찾지 못하는 상태는 이미 건강한 삶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저도 그 시기를 돌아보면, 달력을 보다가 몇 달이 아니라 몇 년이 지나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가 제일 이상했습니다. 예전에 좋아했던 것들이 기억이 흐릿해졌고, 쉬는 날이 와도 뭘 하면 즐거운 건지 잘 모르는 순간이 생겼습니다. 그게 가장 현실적으로 무섭게 느껴진 부분이었습니다.

나중이 아닌 지금, 마음을 잃지 않는다는 것

영화는 두 사람이 스카이다이빙을 하고, 오토바이를 몰고, 히말라야 상공을 날면서 버킷 리스트를 하나씩 지워가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어떤 분들은 이 부분을 "돈 많은 사람들의 판타지"라고 보기도 합니다. 저도 처음엔 그런 생각이 살짝 들었습니다. 그런데 영화의 진짜 무게는 그 여정이 끝날 무렵에 나타납니다.

결국 한 남자가 오랫동안 연락을 끊었던 딸을 찾아가 화해합니다. 거창한 버킷 리스트 항목이 아니라, 그 조용한 화해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울컥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공감(Empathy)과 관계 회복이 죽음 앞에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과제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여기서 공감이란 단순히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상대방의 입장에서 감정을 함께 느끼는 능력을 말합니다.

저는 이 영화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메시지라기보다는, "살아 있는 동안 마음을 잃지 말라"는 이야기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지키는 데 필요한 건 돈이나 시간보다, 먼저 자신이 지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용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같이 밥 먹던 시간, 짧게 웃었던 순간, 누군가와 마음을 나눴던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거창한 성취보다 그런 기억들이 더 오래, 더 따뜻하게 남는다는 걸 이 영화는 조용히 보여줍니다. 아직 "나중에 하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신다면, 이 영화를 한 번 보시길 권합니다. 꼭 결말까지 보셔야 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DQmardjKr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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