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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에서 의사가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사람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을 느낍니다. 저 역시 아버지의 응급수술을 앞두고 그 말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트롱거》를 보는 내내 폭탄 테러보다 가족들의 표정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2017년 개봉한 실화 영화 《스트롱거》는 2013년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로 두 다리를 잃은 제프 바우만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정작 가장 많이 울렸던 장면은 주인공이 아니라 그 곁을 지키던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저도 가족의 갑작스러운 수술을 경험한 뒤로, 이런 영화를 볼 때마다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 그날 제프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2013년 4월 15일, 보스턴 마라톤 결승선 인근에서 두 개의 폭탄이 연달아 터졌습니다. 여자친구 에린을 응원하러 나왔던 제프 바우만은 그 자리에서 두 다리를 잃었고, 영화는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폭발음이 울리는 순간 주변이 아수라장이 되고, 가족들이 "내 아들이 어디 있냐"며 응급실을 헤매는 장면은 실화라는 사실을 알면서 봐도 심장이 내려앉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오래전 아버지의 일이 겹쳐 보였습니다. 갑자기 뇌혈관 질환 증세를 보이신 아버지가 동료분의 손에 이끌려 병원으로 가시던 날, 저도 응급실에서 처음 들은 말이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했을 수 있습니다"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사고나 질병 앞에서 사람은 그냥 멈춰버립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영화 속에서 제프가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펜을 달라고 손짓하는 장면은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그가 쓴 메모가 FBI의 용의자 추적에 결정적인 단서가 됐고, 이후 그는 '시민 영웅'으로 불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제프를 영웅이라 불렀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계속 묻습니다. 영웅은 정말 행복했을까요. 사람들은 그의 용기를 칭찬했지만 정작 그는 매일 폭탄이 터지는 그날을 다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칭찬이 위로가 되지 않을 때도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보여줍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란 극심한 사건을 겪은 뒤 그 기억이 반복적으로 침습해 일상생활을 방해하는 심리적 반응인데, 제프는 이 PTSD를 영웅이라는 이름 뒤에서 조용히 앓고 있었습니다.
- 2013년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 사망자 3명, 부상자 264명(출처: FBI 공식 기록)
- 제프 바우만의 메모가 용의자 식별에 직접적인 단서가 된 실화
- 폭발 이후 영웅으로 불렸지만, 그 이면에는 PTSD와 알코올 의존이 자리 잡고 있었음
재활치료, 몸을 세우는 일보다 마음을 세우는 일이 더 힘들었다
영화에서 제프가 의족을 처음 착용하고 서는 연습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치료사가 "엉덩이를 뒤로 빼고, 천천히"라고 안내하는 그 짧은 장면이 저는 굉장히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재활치료(Rehabilitation Therapy)란 단순히 신체 기능을 회복하는 의료 행위가 아닙니다. 여기서 재활치료란 손상된 신체 기능을 최대한 회복시키는 동시에, 환자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신체·심리·사회적 지원을 포괄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제 아버지도 뇌혈관 수술 이후 한쪽 몸에 마비가 남아 약 6개월간 재활 병동에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는 것조차 힘드셨고, 조금씩 좋아진다는 느낌이 들다가도 다음 날 다시 제자리인 날이 더 많았습니다. 그 반복 속에서 아버지보다 곁에 있는 가족들이 먼저 지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병원에서는 밤이 더 길었습니다. 복도 의자에서 잠을 자다가 간호사 발소리에 깨고, 새벽 회진 시간이 가까워지면 괜히 긴장했습니다. 아버지가 잠든 모습을 확인하고 집에 돌아왔지만, 혹시 병원에서 전화가 올까 휴대전화 소리를 가장 크게 해 두고 잤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 시간은 환자보다 보호자가 더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해 준 시간이었습니다.
영화 속 제프도 비슷한 과정을 겪습니다. 의족을 달고 서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다시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일이었고, 그 과정에서 그는 알코올에 의존하며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알코올 의존(Alcohol Dependence)이란 음주 조절 능력이 상실되고 신체적·심리적으로 알코올에 종속된 상태를 의미하는데, 쉽게 말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뇌와 몸이 이미 알코올 없이는 버티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단순히 '나쁜 행동'으로 보기보다 극심한 고통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족의 희생, "이 일은 너에게만 일어난 게 아니야"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에린이 제프에게 울먹이며 외치는 대사입니다. "눈을 한 번만 떠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삶을 바꿔서 너 주위를 맴돌고 있는지." 저는 이 대사를 들으며 멍해졌습니다.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느꼈던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입원해 계시던 6개월 동안, 저는 가능한 모든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병원 생활이 길어질수록 짜증이 나는 대상이 아버지가 아니라 '이 상황 자체'가 되어간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프신데, 저는 피로하다는 이유로 전화를 미루기도 하고, 사소한 것에 날이 서기도 했습니다. 그 감정이 부끄러워서 오래 마음속에 숨겨뒀습니다.
에린의 그 대사는 그 감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해 줬습니다. 가족 돌봄 부담(Caregiver Burden)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가족 돌봄 부담이란 환자를 돌보는 가족 구성원이 신체적·심리적·경제적으로 겪는 복합적인 소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국내 연구에서도 장기 입원 환자의 주 보호자 중 상당수가 우울 증상을 경험한다는 결과가 보고된 바 있습니다(출처: 보건복지부). 사고는 한 사람에게 일어나지만, 그 무게는 가족 전체가 나눠집니다. 그리고 그 무게를 짊어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합니다.
영화가 남긴 진짜 질문, 우리는 가까운 사람의 희생을 알고 있나
영화 후반부에 제프는 야구장 시구 행사에 참석합니다. 의족을 달고 마운드 위에 서려는 순간, 갑자기 폭발 당시의 기억이 밀려오면서 온몸이 굳어버립니다. 플래시백(Flashback)이란 과거의 극한 경험이 현재의 감각 자극에 의해 생생하게 재현되는 PTSD의 대표적 증상으로,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는 결국 그 자리를 빠져나오지만, 나중에 다시 의족을 달고 그 마운드를 완주합니다. 누군가 익명의 팬이 건넨 한마디, "당신은 우리를 부수지 못했어"라는 말과 함께.
그런데 저는 그 장면보다 카를과의 대화 장면이 더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카를은 테러 현장에서 아들을 잃은 아버지였는데, 그날 제프를 도왔던 사람이었습니다. "내 아이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도망치지 않고 불길로 달려갔습니다. 당신을 도운 것이 아들을 도운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이 대사에서 제프는 처음으로 자신의 고통 밖을 봅니다.
저는 부모님을 돌보면서 한 가지를 느꼈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가 해주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아침밥도, 학교 준비도, 아프면 병원도. 그런데 부모님이 연세가 들고 나니 그 당연했던 것들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우리는 부모에게 받은 것은 쉽게 잊고, 부모가 필요한 순간은 너무 늦게 알아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부모는 열 자식을 키워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못 모신다."라는 말을 남긴 것이겠지요. 예전에는 너무 냉정한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틀린 말이라기보다, 사람이라는 존재를 가장 현실적으로 설명한 말처럼 들립니다. 직접 부모님 곁에서 병원 생활을 함께해보고 나니 이보다 정확한 말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까운 사람의 사랑을 너무 쉽게 당연하게 여기며 사는 것, 그게 사람의 본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사실을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은 다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스트롱거》는 실화인가요?
A. 맞습니다. 2013년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에서 실제로 두 다리를 잃은 제프 바우만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제프가 직접 쓴 회고록이 원작이며, 배우 제이크 질렌할이 제프 역을 연기했습니다.
Q. 영화에서 에린과 제프는 실제로 결혼했나요?
A. 영화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실제로 제프와 에린은 이후 결혼해 아이를 낳았습니다. 영화가 개봉 당시 이미 에린의 임신 사실이 영화 안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으로 다뤄집니다.
Q. 재활치료 중 심리적 어려움은 어떻게 극복하나요?
A. 영화 속 제프처럼 신체 재활과 동시에 심리적 지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PTSD나 알코올 의존 같은 문제는 의지만으로 해결이 어렵기 때문에 전문 심리 상담이나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병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족의 정서적 지지가 회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도 여러 연구에서 확인된 바 있습니다.
Q. 가족 돌봄 부담, 어디서 도움을 받을 수 있나요?
A. 국내에는 보건복지부 산하 치매안심센터, 정신건강복지센터 등에서 주 보호자를 위한 심리 상담과 돌봄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혼자 버티려 하기보다 지역 내 가용 자원을 먼저 찾아보시는 것을 권합니다. 지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결론
응급실에서 들었던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했습니다."라는 말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부모님께 안부를 미루지 않게 됐습니다. 우리는 늘 내일이 있다고 믿지만, 누군가에게는 오늘이 마지막 평범한 하루일 수도 있습니다.《스트롱거》를 보고 난 뒤 가장 오래 남은 것은 폭탄 테러가 아니라 가족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부모는 열 자식을 키워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못 모신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과장된 말인 줄 알았지만, 부모님의 병원 생활을 함께 겪으며 그 의미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기다리는 것은 거창한 효도가 아니라 "잘 지내세요?"라는 안부 한마디일지도 모릅니다. 《스트롱거》는 제게 두 다리를 잃은 한 남자의 실화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후회 없이 바라볼 시간이 지금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알려준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