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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에서 실수 없이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 한 번쯤은 느껴보셨을 겁니다. 저도 품질관리 업무를 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일이 즐겁다기보다 '틀리지 않아야 한다'는 긴장이 먼저 앞서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시절 우연히 다시 본 영화 《위대한 승부》가 그 감정을 정확히 건드렸습니다. 체스 신동 조시의 이야기인데, 사실 이건 체스 영화가 아닙니다. 경쟁 사회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재능이 있다는 건, 축복일까 짐일까

    영화 속 조시는 공원에서 낯선 어른들과 체스를 두며 자연스럽게 실력을 키웁니다. 처음엔 그냥 재미있어서 두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주변이 그 재능을 알아채는 순간부터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아버지는 기대를 품고, 코치는 더 철저하게 훈련시키려 합니다. 조시는 점점 '체스를 좋아하는 아이'에서 '이겨야 하는 아이'로 바뀌어 갑니다.

    재능(Talent)이란 단어를 흔히 선물처럼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경험상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뭔가를 잘한다는 게 알려지는 순간, 주변의 기대치가 올라가고 그 기대는 곧 압박이 됩니다. 저도 입사 초반에 꼼꼼하다는 평을 들은 뒤로 '이 사람은 실수하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묘하게 형성됐습니다. 칭찬이 시작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 칭찬이 족쇄가 된 겁니다.

    실제로 심리학에서는 이를 고정 마인드셋(Fixed Mindset)과 성장 마인드셋(Growth Mindset)으로 구분합니다. 여기서 고정 마인드셋이란 자신의 능력이 타고난 것으로 고정되어 있다고 믿는 사고방식으로, 실패를 자신의 한계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성장 마인드셋은 노력과 경험으로 능력이 발전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스탠퍼드대학교 심리학자 캐럴 드웩의 연구에 따르면, 재능을 칭찬받은 아이일수록 실패를 두려워하는 고정 마인드셋에 빠지기 쉽습니다(출처: Stanford Daily). 조시가 겪은 것도 정확히 이 패턴이었습니다.

    • 재능이 알려지는 순간 외부 기대치가 급격히 올라간다
    • 칭찬 중심의 피드백은 오히려 실패 공포를 강화할 수 있다
    • 즐기는 마음이 사라지면 실력도 결국 흔들린다
    요약: 재능은 축복이기도 하지만, 주변의 기대와 맞물리면 즐거움을 빼앗는 짐이 될 수 있습니다.

    경쟁 압박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가

    영화에서 코치 브루스는 조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상대를 경멸해야 한다고, 미워해야 한다고. 바비 피셔가 그랬다는 겁니다. 하지만 조시는 끝내 그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상대방을 증오하며 이기는 것보다 스스로 다운 방식으로 두는 것을 선택합니다. 저는 이 장면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기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가 결국 그 사람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것을 보여주니까요.

    경쟁 압박(Competitive Pressure)이란 외부의 기대나 비교에서 비롯된 심리적 긴장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지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 행동의 동기가 되는 상태입니다. 스포츠 심리학에서는 이를 수행 불안(Performance Anxiety)이라고도 부릅니다. 여기서 수행 불안이란 평가받는 상황에서 실패를 두려워한 나머지 오히려 평소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상입니다. 조시가 한 대회에서 7수 만에 지고 무너지는 장면이 정확히 이 상태를 보여줍니다.

    경쟁이 성장의 원동력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그게 절반만 맞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 보니, 적당한 긴장은 집중력을 끌어올리지만 '지면 존재 자체가 부정된다'는 감각까지 가면 사람이 쪼그라듭니다. 일을 잘하고 싶은 게 아니라 틀리지 않으려는 것에만 에너지가 집중되는 거죠. 그 차이는 겪어본 사람만 압니다.

    조시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기지 않아도 괜찮다"라고 말하는 순간이 전환점이 됩니다.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 이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부터 조시는 다시 자기 방식으로 둡니다. 상대의 판이 아니라 자기 판을 읽기 시작한 겁니다.

    요약: 경쟁 압박이 지나치면 실력 발휘가 아닌 실수 회피에 에너지를 쏟게 되고, 결국 본래의 자기 방식마저 잃습니다.

    성장이란 무엇인가 — 이기는 것과 나아지는 것의 차이

    영화는 마지막에 조시가 결승전에서 비긴다는 결말을 선택합니다. 완승이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이 결말을 두고 "좀 더 극적으로 이겼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결말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정직하다고 느꼈습니다. 삶은 체크메이트로 끝나는 게임이 아니니까요.

    체스에는 포지셔널 플레이(Positional Play)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포지셔널 플레이란 즉각적인 전술 공격보다 장기적으로 유리한 구조를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당장 눈에 보이는 이득보다 전체 흐름을 읽는 능력을 요구합니다. 반면 택티컬 플레이(Tactical Play)는 단기적인 콤비네이션으로 즉각 이득을 노리는 방식입니다. 영화에서 코치가 조시에게 전술이 아닌 포지션을 가르치려 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빠른 승리보다 오래 버티는 힘을 기르는 것, 이게 진짜 실력이라는 거죠.

    직장 생활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단기 성과를 위해 남보다 빠르게 달리는 것과, 천천히 자기 기준을 세워가며 나아지는 것, 이 두 가지는 방향이 다릅니다. 저 역시 예전엔 남들보다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는데, 그게 이뤄졌을 때 공허했습니다. 비교에서 이겼지만 스스로 나아지고 있다는 감각이 없었으니까요.

    세계적인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이를 몰입(Flow)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몰입이란 활동 자체에 완전히 빠져들어 시간과 자의식을 잊는 최적 경험 상태를 말합니다. 그는 외적 보상이 아닌 활동 자체의 즐거움에서 이 상태가 온다고 강조합니다(출처: TED - Mihaly Csikszentmihalyi). 조시가 공원에서 낯선 어른들과 체스를 두던 장면, 그게 바로 몰입의 순간이었습니다.

    • 포지셔널 플레이처럼, 성장은 장기적인 흐름을 보는 안목에서 시작된다
    • 남과의 비교에서 이기는 것과 어제의 나보다 나아지는 것은 다른 방향이다
    • 몰입 상태는 외적 평가가 아니라 활동 자체의 즐거움에서 온다
    요약: 진짜 성장은 남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기준으로 어제보다 나아지는 과정에 있습니다.

    결과보다 과정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법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마음이 무거웠던 건 조시가 아니라, 어느새 조시를 만들어내는 어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솔직히 저 역시 한동안은 이기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싶었고, 실수 없는 직원이라는 말을 들으면 괜히 뿌듯했습니다. 하지만 그 욕심이 커질수록 일은 재미가 아니라 시험이 됐습니다. 출근하면서 '오늘은 뭘 배울까'보다 '오늘은 실수하지 말아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가끔은 우리 사회가 사람을 성장시키기보다 계속 경쟁만 시키는 구조라는 생각도 듭니다. 학교에서는 등수로, 회사에서는 성과와 연봉으로, SNS에서는 팔로워와 조회수로 사람의 가치를 쉽게 숫자로 바꿔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남보다 앞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뒤처지면 스스로 실패한 사람처럼 느끼게 됩니다.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 효능감이란 특정 상황에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말합니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가 제안한 이 개념은, 외적 평가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장기적 성취에 훨씬 결정적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조시가 결승에서 흔들리지 않고 자기 수를 둘 수 있었던 것도 결국 이 자기 효능감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기고 싶은 마음은 잘못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잃는 것입니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 나를 미워하게 되고, 비교에 익숙해질수록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저는 이제 누군가를 이기는 것보다 어제보다 조금 더 성장한 나를 만드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고, 훨씬 가치 있는 경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오래 살아남는 사람은 가장 강한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자기 방식과 자기 마음을 지킨 사람이라는 것을 이 영화가 조용히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요약: 자기효능감을 기반으로 기준을 내면에 두는 것이, 경쟁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위대한 승부》는 천재 체스 소년의 성공담이 아닙니다. 이기는 것과 나다운 것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한동안 멍했습니다. 영화 속 조시의 모습이 제 이십 대 후반과 너무 닮아 있어서였습니다. 만약 지금 일이 즐겁지 않고 긴장만 앞선다면, 이 영화 한 편을 권하고 싶습니다. 거창한 동기부여보다, 이런 조용한 영화 한 편이 더 오래 남을 때가 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z1bta4DFp7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