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좀비 영화라면 피와 쫓고 쫓기는 장면만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좀비딸》 예고편을 켰을 때도 가볍게 웃고 나올 작품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좀비보다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이상하게 마음 한쪽이 무거워졌습니다. 그 감각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기억이 있으면 좀비가 아니야."
영화에서는 웃기게 넘어갈 수도 있는 대사였지만 저는 이상하게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사실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을 곁에서 지켜본다는 건 생각보다 무서운 일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깜빡하는 정도입니다. 휴대폰을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리고, 방금 했던 말을 반복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외할머니를 모시며 가장 힘들었던 건 몸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은 저를 알아보실까. 내 이름을 기억하실까. 그 걱정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가끔은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어릴 적 저를 업고 시장을 다니시던 분인데, 어느 날은 저를 보고도 누구냐고 물으시니까요. 그런데 또 신기하게도 어린 시절 이야기는 정확하게 기억하십니다. 제가 초등학교 입학하던 날 이야기, 동네 친구 이름,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 이야기까지. 그럴 때면 사람의 기억이라는 게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속 수아가 좋아하던 노래에 반응하는 장면도 그래서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어쩌면 사람은 기억으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감정으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국내 65세 이상 노인의 치매 유병률은 약 10.38%로, 100만 명 이상이 치매를 앓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출처: 중앙치매센터). 이 숫자를 볼 때마다 저는 우리 외할머니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가족이 그만큼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통계 뒤에는 실제로 매일 밤 잠들기 전 "오늘은 나를 알아봐 주실까" 생각하며 잠드는 가족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정환이 포기하지 못한 진짜 이유
영화 속 정환은 동물원 사육사입니다. 동물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이 좀비가 된 딸 수아를 훈련시키겠다는 발상 자체가 코미디처럼 들립니다. 안 물기 훈련, 사회성 훈련, 기억 회복 훈련. 군부대가 감염자를 발견 즉시 사살하겠다고 발표한 상황에서 아버지 혼자 딸을 붙들고 있는 모습은 객관적으로 보면 무모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무모함이 오히려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정환이 수아에게 최애곡을 틀어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수아가 반응을 보이자 정환은 "기억이 살아 있으면 바이러스가 약해진다"라고 믿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영화적 설정이지만, 음악 자극을 통한 정서적 기억 활성화는 실제 치매 치료에서도 활용되는 방법입니다. 음악 인지 치료(Music Cognitive Therapy)란 음악의 리듬과 멜로디가 감정 기억과 연결된 뇌 영역을 자극해 인지 기능 저하를 늦추는 치료법을 말합니다.
제 경험상 이게 단순한 이론이 아닙니다. 외할머니께서 제 이름을 못 부르시는 날에도 어릴 때 자주 들으시던 노래를 틀어드리면 얼굴 표정이 달라집니다. 그 순간만큼은 어딘가 연결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정환이 딸의 기억을 믿었던 것처럼, 저도 그 짧은 순간에 매달리게 됩니다.
영화가 코미디 문법을 쓰면서도 묵직한 이유는 바로 이 지점 때문입니다. 웃음 뒤에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이 따라옵니다.
좀비 영화가 말하는 것, 사실은 우리 사회 이야기
저는 요즘 사회가 너무 빠르게 사람을 평가한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얼마나 버는지. 얼마나 생산적인지. 얼마나 쓸모 있는지.
마치 인간의 가치가 성과표 한 장으로 결정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기계가 아닙니다. 아프기도 하고, 실수하기도 하고, 때로는 멈춰 서기도 합니다.
문제는 사회가 그런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회사에서도 그렇고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조금 느리면 뒤처진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저는 《좀비딸》이 좀비 영화라기보다 기다림에 대한 영화라고 느꼈습니다. 끝까지 기다려주는 사람. 끝까지 믿어주는 사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 말은 쉽지만 현실에서는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저 역시 외할머니를 모시면서 여러 번 흔들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집에 가면 안부를 묻게 됩니다. 가족이라는 건 원래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끝난 뒤 제 머릿속에 남은 건 좀비가 아니었습니다.
"아빠 조금만 더 기다려 줄 수 있어?"그 한마디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기다림을 받고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부모에게, 가족에게, 친구에게. 그래서 《좀비딸》은 좀비 영화가 아니라 결국 사랑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화려하거나 거창한 것이 아니라, 오늘도 묵묵히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더 가깝습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알면 좋은 것들
《좀비딸》은 전 세계 누적 조회수 1억 뷰를 기록한 네이버 웹툰 원작을 실사화한 작품입니다. 웹툰의 실사화(Live-Action Adaptation)란 만화나 애니메이션 원작을 실제 배우가 출연하는 영상 콘텐츠로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원작 팬들 사이에서 실사화는 원작의 감성을 얼마나 살렸느냐가 늘 화두가 됩니다.
《좀비딸》은 개봉 전부터 원작 팬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 출발이 좋습니다. 《엑시트》로 942만 관객을 동원한 조정석이 아버지 정환 역을 맡았고, 이정은, 조여정, 윤경호, 최리가 함께 출연합니다.
이 영화를 즐기기 위해 미리 알아두면 좋은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웹툰 원작 특유의 과장된 캐릭터와 상황 묘사가 영화에도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 좀비물 특유의 공포보다는 코미디와 감동의 비중이 훨씬 높습니다.
- 할머니 밤순 캐릭터가 예상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합니다. 특히 손녀를 처음 알아봤을 때의 반응이 이 영화의 정서적 핵심 중 하나입니다.
- 좀비 바이러스의 확산 속도와 군의 대응 방식은 현실 감염병 대응 절차(방역 당국의 격리 및 이동 통제 지침)를 느슨하게 차용하고 있어, 코로나19 이후 시대의 관객에게 묘하게 현실감 있게 다가옵니다.
2023년 연구에 따르면 가족 돌봄 제공자의 약 40~70%가 임상적 수준의 우울 증상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누군가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 영화처럼 웃기기만 한 일이 아니라 실제로는 얼마나 소진되는 일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수치가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