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여름이면 뉴스에서는 "역대 최고 기온"이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예전에는 그저 날씨 뉴스의 한 문장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 말이 현실의 경고처럼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영화 지오스톰을 다시 보면서도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과장된 재난 영화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영화보다 현실이 더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무섭게 느껴집니다.
사계절 - 사라진 계절, 잃어버린 일상의 풍경
영화 지오스톰은 극단적인 기후 이변으로 죽어가는 지구를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수천 개의 인공위성으로 구성된 기후 통제 시스템 '더치보이'가 오작동하면서 사막 한가운데 마을이 순식간에 얼음으로 뒤덮이고, 도쿄 상공에서는 갑작스러운 우박이 쏟아집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설정이 너무 과장됐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뉴스를 보면 그 생각이 조금씩 바뀝니다.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을 나타내는 지표인 지구온난화 지수(GWI)는 산업화 이전 대비 1.1도 이상 상승한 상태입니다. 여기서 GWI란 지구 전체의 열 에너지 균형이 얼마나 틀어졌는지를 수치로 보여주는 지표로, 이 수치가 1.5도를 넘으면 생태계와 기후 시스템 전반에 돌이키기 어려운 변화가 시작된다고 과학자들은 경고합니다. 2023년 기준 지구 평균 기온은 산업화 이전보다 약 1.45도 높았습니다(출처: 세계기상기구(WMO)).
제가 어릴 때만 해도 계절은 달력보다 먼저 몸이 기억했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 공기 냄새가 달랐고, 학교 운동장에 떨어진 낙엽만 봐도 겨울이 다가온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봄이 되면 개나리와 벚꽃이 피었고, 가을이 되면 높아진 하늘을 보며 괜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때는 사계절이 너무 당연했습니다. 그래서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벚꽃이 피었다가 채 지기도 전에 여름이 시작되고, 가을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손님처럼 짧아졌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가을옷을 꺼낸 기억보다 에어컨을 오래 켰던 기억이 더 선명합니다.
사람들은 "원래 날씨가 그런 거 아니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계절과 지금의 계절은 분명히 다릅니다. 더 안타까운 건 우리가 그 변화에 너무 빨리 적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전 같으면 이상하다고 느꼈을 날씨가 이제는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잃고 있는 건 단순한 날씨가 아닙니다. 계절 속에 담겨 있던 추억과 감정, 그리고 평범한 일상의 풍경입니다.
기상이변보다 무서운 건 무감각해진 현실
뉴스에서는 매년 비슷한 표현이 등장합니다."관측 이래 최고", "100년 만의 폭우", "역대 최장 열대야."처음에는 놀랐습니다. 하지만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 놀라지 않게 됐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부분이 가장 무섭습니다. 재난이 아니라 재난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말입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35도는 기록적인 폭염이었습니다. 지금은 35도가 평범하게 느껴집니다. 폭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로가 잠기고 지하주차장이 침수되는 장면이 뉴스에 나와도 며칠 뒤면 잊힙니다.
마치 모든 것이 원래 그랬던 것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 저는 노부모를 모시고 생활하다 보니 이런 변화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폭염 경보가 뜨면 먼저 부모님 건강이 걱정됩니다. 밤에도 열기가 식지 않으면 혹시 잠을 제대로 못 주무시지는 않을까 신경이 쓰입니다.
예전에는 더위가 불편함의 문제였다면 지금은 건강과 생존의 문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회는 너무 쉽게 적응합니다. 기록이 깨지면 잠시 놀라고, 며칠 지나면 다시 잊어버립니다. 어쩌면 기후변화보다 더 위험한 것은 변화 자체가 아니라 변화에 무감각해진 우리의 태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상이변이 일상화되면서 나타나는 주요 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봄과 가을의 체감 기간이 눈에 띄게 짧아졌습니다. 벚꽃이 피었다 싶으면 며칠 뒤 낮 기온이 30도에 가까워집니다.
- 폭염 일수와 열대야 일수가 동시에 늘고, 겨울에는 반대로 한파의 강도가 높아지는 기상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 집중호우의 빈도와 강도가 증가하면서 도심 침수 피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 "역대 최고", "관측 이래 최초"라는 표현이 뉴스에서 매년 등장하지만, 다음 해에 또 깨집니다.
경고 - 기상예보가 생존 정보가 되는 시대
영화 지오스톰에서 더치보이의 킬코드(Kill Code)가 필요했던 것처럼, 현실에서도 기후 통제를 위한 국제적 합의와 구체적인 실행 코드가 필요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탄소중립(Carbon Neutrality)입니다. 탄소중립이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의 양과 흡수·제거하는 양을 같게 만들어 실질적인 탄소 배출량을 0으로 만드는 목표를 말합니다. 한국은 2050년 탄소중립을 법으로 명시한 상태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거대 담론처럼 느껴졌던 탄소중립이 이제는 에너지 요금, 여름철 생존, 다음 세대의 계절 경험과 직결된 현실 문제가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예전 기상예보는 하루를 준비하는 생활 정보였습니다."내일 비가 옵니다.""우산 챙기세요."그 정도면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다릅니다. 폭염 특보가 발령되면 외출을 줄이고, 집중호우 예보가 뜨면 침수 위험 지역부터 확인합니다. 기상예보가 더 이상 편의를 위한 정보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정보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지오스톰에서는 기후를 통제하는 시스템이 고장 나면서 전 세계가 위기에 빠집니다. 현실은 영화와 다릅니다.
하지만 영화가 던진 질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인간은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만, 과연 자연은 인간의 계산대로 움직일까요?
매년 깨지는 최고 기온 기록, 점점 길어지는 여름, 짧아지는 봄과 가을을 보면서 저는 그 질문을 자주 떠올립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환경 전문가도 아니고 과학자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도 느낄 수 있는 변화가 있습니다. 예전보다 뜨거워진 여름. 사라져 가는 가을.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한 사회. 그래서 올해 가을이 오면 일부러라도 산책을 나가보려고 합니다. 언젠가 "예전에는 우리나라에도 사계절이 있었어"라는 말이 추억으로만 남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영화 지오스톰을 보고 난 뒤 제 마음에 가장 오래 남은 것은 거대한 재난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계절이 사실은 가장 소중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리고 그 소중함을 잃어가고 있다는 현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