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은 원래 착해서 가족을 지키는 걸까요, 아니면 가족을 지키다 보니 조금씩 착해지는 걸까요.
저는 영화 크리미널(Criminal)을 보고 나서 한동안 이 질문을 곱씹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액션 스릴러라고 생각했습니다. CIA 요원, 테러 조직, 해킹과 추격전이 등장하니 당연히 그런 영화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끝까지 보고 나니 총격전보다 한 인간이 변해가는 과정이 더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특히 2023년부터 치매와 고관절 골절을 동시에 겪으신 외할머니를 돌보며 살아온 제 입장에서는 영화가 전혀 다르게 보였습니다.
기억이식 보다 강한 것은 관계였다
영화 크리미널은 사망한 CIA 요원 빌 포스터의 기억을 강력범 제리코의 뇌에 이식하는 설정으로 시작합니다. 이때 핵심 개념이 바로 신경 가소성(Neuroplasticity)입니다. 신경 가소성이란 뇌가 새로운 경험이나 자극에 반응해 신경 회로 자체를 재구성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태어날 때 뇌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뇌는 평생에 걸쳐 스스로를 바꿀 수 있습니다.
영화 속 뇌과학자 닥터 프라이스는 이 원리를 극단적으로 응용합니다. 이미 전두엽(Frontal Lobe)이 발달하지 않은 제리코를 수술 대상으로 삼은 것도 이 맥락입니다. 전두엽이란 공감, 도덕 판단, 충동 억제 같은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는 뇌의 앞쪽 부위입니다. 제리코는 전두엽 기능 자체가 결손 된 인물로 묘사되는데, 그 공간에 다른 사람의 기억이 자리를 잡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가 영화의 핵심 질문입니다.
처음의 제리코는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범죄자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의 생존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빌 포스터의 기억이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변화가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단편적인 장면들이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를 사랑했던 감정, 딸을 지키고 싶었던 마음, 가족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함께 느끼게 됩니다.
저는 이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관계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현실에서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아끼게 되면 판단 기준 자체가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중요했던 것들이 뒤로 밀리고, 그 사람의 안전과 행복이 먼저 생각됩니다. 영화 속 제리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를 변화시킨 것은 기억 자체가 아니라 기억 속에 담겨 있던 사랑과 책임감이었습니다.
물론 현실에서 기억 이식(Memory Engram Transfer), 즉 특정 기억의 신경학적 패턴을 통째로 다른 뇌에 옮기는 기술은 현재 과학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다만 기억 엔그램(Memory Engram) 연구는 실제로 진행 중입니다. 기억 엔그램이란 특정 기억이 뇌 안에서 물리적으로 저장되는 신경세포의 집합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2012년 MIT 연구팀이 쥐의 공포 기억을 특정 뉴런 집합과 연결하는 데 성공한 이후 연구가 빠르게 진전되고 있습니다(출처: MIT 피코워 학습·기억 연구소).
크리미널이 흥미로운 이유는 설정의 실현 가능성이 아니라, 그 설정이 던지는 질문 때문입니다. 제리코가 처음에는 기억을 무시하다가 점점 그 감정의 흐름에 이끌리는 장면들은 단순한 SF 장치라기보다 인간 정체성의 본질에 대한 물음처럼 느껴졌습니다.
돌봄이 사람을 바꾼다는 것, 가족을 지키려는 본능은 생각보다 강하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사람이 바뀌는 데는 강의나 책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외할머니를 돌보기 시작한 첫 달은 솔직히 버티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아침에 기저귀를 갈고 출근하고, 퇴근하면 다시 상태를 확인하는 루틴이 반복됐습니다. 지쳐서 짜증이 나면서도 짜증이 나는 제 자신이 또 싫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자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치매 환자의 반복 질문이나 돌발 행동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치매(Dementia)란 뇌세포의 손상으로 기억, 언어, 판단력이 점진적으로 저하되는 신경퇴행성 질환입니다. 단순히 기억을 잃는 것이 아니라 시간 감각과 자아 인식 자체가 흐려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낯선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고집"이 아니라 뇌 손상의 결과라는 것을 몸으로 이해하게 된 겁니다. 책으로 읽었을 때는 그냥 정보였는데, 매일 곁에서 보고 나니 다른 차원의 이해가 됐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인터넷에서는 돌봄을 "희생"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는 받는 쪽만이 아니라 하는 쪽도 바뀝니다. 저는 그 과정에서 예전보다 훨씬 참을성이 생겼고, 두 마리 고양이 바론이 와 쿠키를 키우면서는 작은 변화에도 민감해졌습니다. 고양이가 밥을 남기거나 평소와 다른 자세로 앉아 있으면 바로 눈치채게 된 것도 그 시기부터입니다.
7년 전 어머니가 보이스피싱 조직에 속았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차를 몰고 경찰과 통화하며 사기 조직을 쫓아다녔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돈에 대한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돈은 잃어도 된다, 사람만 다치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이 그 순간 너무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나중에 돌아보니 그건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본능에 가까운 반응이었습니다.
크리미널의 제리코도 그런 순간을 맞이합니다. 이성으로는 도망가는 것이 맞지만, 몸이 먼저 움직이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그 장면들이 액션보다 훨씬 오래 기억에 남은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인지신경과학(Cognitive Neuroscience) 분야의 연구에 따르면 애착 관계에 있는 대상이 위협받을 때 인간의 뇌는 의식적 사고보다 편도체(Amygdala) 중심의 감정 회로가 먼저 반응합니다. 편도체란 공포와 감정 반응을 처리하는 뇌의 핵심 구조물로, 위기 상황에서 이성보다 빠르게 행동을 유발한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확인된 바 있습니다(출처: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 제리코의 변화는 그래서 비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본능에 가장 충실한 묘사일 수 있습니다.
영화 크리미널은 과학적으로 완벽한 작품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이 영화를 보며 기억보다 감정이 먼저라는 것, 그리고 사람을 바꾸는 건 지식이 아니라 관계와 경험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제리코가 남의 기억으로 인해 더 나은 사람이 됐다면, 저는 외할머니 곁에서 보낸 시간이 저를 조금은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줬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적어도 그전보다는 타인의 사정을 쉽게 판단하지 않게 됐습니다. 크리미널이 단순한 액션 영화 이상으로 남아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한 번쯤 시간을 내서 보시길 권합니다. 장면보다는 질문을 따라가며 보시면 훨씬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