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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비가 3,500억 원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사실 크게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요즘 대작 영화 제작비가 워낙 크다 보니 '놀란이 이번에도 크게 만들었구나'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8월 8일 수원 롯데시네마에서 직접 보고 나오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돈을 많이 쓴 영화와 공을 많이 들인 영화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은 영화 전문가의 리뷰가 아닙니다. 평일에 극장을 못 가는 직장인이 주말 아침 일찍 예매해두고 며칠을 기다린 끝에 본 한 편의 영화 이야기입니다.
오전 10시 상영이었지만 괜히 늦기 싫어서 30분 정도 일찍 극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롯데시네마 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조금 놀랐습니다. 사람이 정말 많았습니다. 순간 '이 사람들 설마 전부 오디세이 보러 온 건가?'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물론 다른 영화를 보러 온 사람도 있었겠지만, 요즘 극장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본 게 오랜만이라 그것부터 기분이 묘했습니다. 간식거리를 사고 상영관에 들어가 영화 시작 전에 팝콘을 꽤 먹었는데, 정작 영화가 시작된 뒤에는 거의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장인정신 — 이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영화 역사상 최초로 작품 전체를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로 촬영했다는 사실은 알고 갔습니다. 촬영 기간 91일, 사용된 필름만 약 210만 피트, 길이로 환산하면 640km. 서울에서 부산을 왕복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출처: IMDb). 숫자를 머릿속에 넣어두고 극장에 들어갔는데, 막상 스크린이 켜지고 나서는 그 수치가 실감으로 바뀌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맥스 필름 촬영이 일반적인 디지털 촬영과 다르다는 정도는 알고 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촬영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해상도나 필름 규격을 이야기하기보다 제가 극장에서 실제로 본 느낌을 적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느낀 건 화면이 단순히 '크다'는 것이 아니라 이상할 만큼 깊어 보인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인물과 배경이 함께 잡히는 장면에서는 제가 화면을 보고 있는 건지, 그 공간 앞에 앉아 있는 건지 순간 헷갈릴 정도였습니다.
화면 안쪽으로 공간이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배우의 얼굴이 크게 잡힐 때는 작은 표정 변화까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의상, 미술, 세트 어느 것 하나 대충 만들어진 느낌이 없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놀란 감독보다 오히려 카메라 뒤에 있는 사람들이 몇 번 떠올랐습니다. 저 장면 하나를 찍으려고 세트를 얼마나 만들었을까, 배우들은 몇 번이나 다시 찍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제작을 잘 모르는 제가 봐도 화면 곳곳에서 사람 손이 많이 갔다는 느낌만큼은 확실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잘 만들었다'보다 먼저 '장인정신'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요즘 그 단어를 이렇게 선명하게 느낀 적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 제작비 약 3,500억 원 — 놀란 필모그래피 중 최고 규모
- 작품 전체 아이맥스 필름 카메라 촬영 — 영화 역사상 최초
- 개봉 첫 주말 북미 수익 약 1억 2,450만 달러 기록
- 전 세계 4일 수익 약 3,700억 원 — 제작비에 거의 육박
귀환 — 20년이라는 시간이 가슴에 박힌 이유
《오디세이》의 원작은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서사시 《오디세이아》입니다.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을 다룬 작품으로, 기원전 8세기 무렵 지금과 비슷한 형태로 정리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쟁을 마친 영웅이 수많은 시련을 거쳐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는 이후 서양의 수많은 모험과 귀환 서사에도 영향을 줬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저는 이 작품을 괴물 퇴치 모험담 정도로 막연하게 떠올렸습니다. 트로이 목마,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 마녀 키르케, 세이렌의 노래. 어릴 때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에서 봤던 장면들이 머릿속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온 뒤 제 머릿속에 가장 오래 남은 것은 그 어떤 괴물 장면도 아니었습니다.
'20년'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전쟁에 10년, 귀환하는 데 다시 10년. 갓 태어난 아이가 성인이 되고도 남는 시간입니다.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꼬집었습니다. 옆에 사람이 있어서 감정을 억누르려 한 행동이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굳이 참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그 장면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페넬로페를 보면서 '기다린 사람의 20년'이 오히려 더 무거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디세우스에게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페넬로페에게는 시간이 쌓였습니다. 남편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채, 매일 같은 궁전에서 압박을 견디며 하루씩 버티는 것. 이상하게 저는 이 장면에서 오디세우스보다 페넬로페 쪽에 더 마음이 갔습니다. 떠난 사람에게는 하루하루 새로운 사건이라도 있었겠지만,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오늘도 안 오고 내일도 안 오는 시간이 반복됐을 테니까요. 누군가 저에게 20년 동안 한 사람을 기다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페넬로페의 기다림이 더 대단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만과 지략 — 오디세우스는 과연 영웅인가
영화를 보고 나온 뒤 제 안에는 감탄과 동시에 불편함도 남았습니다. 오디세우스는 분명 탁월한 인물입니다. 트로이 전쟁을 끝낸 것도, 폴리페모스의 동굴에서 살아남은 것도 결국 그의 지략(智略), 즉 상황을 읽고 최선의 수를 찾아내는 능력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극장을 나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행동들을 지금 현실에 가져오면 어떻게 불릴까. 조직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말,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한 결정이었다는 말은 직장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귀에 익은 표현입니다. 품질관리 일을 하면서도 비슷한 말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회의실에서는 '전체 손실을 막으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습니다. 숫자만 놓고 보면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정 때문에 다시 작업해야 하는 현장 사람이나 손실을 떠안는 거래처 입장에서 보면 같은 숫자도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스킬라(Scylla)를 통과하는 장면이 특히 불편했습니다. 스킬라는 여섯 개의 머리로 배 위의 선원들을 한 명씩 잡아먹는 괴물입니다. 오디세우스는 배에 탄 모두를 잃는 것보다 여섯 명을 희생하는 쪽을 선택했고, 그 위험을 부하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았습니다.
배에 탄 사람 모두를 잃느니 여섯 명을 희생하는 것이 낫다. 숫자만 놓고 보면 합리적인 판단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장면에서 이상하게 신화 속 괴물보다 회사 회의실에서 들었던 말들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전체 손실을 막으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저 역시 직장생활을 하면서 비슷한 말을 들어봤기 때문입니다.
결정하는 사람에게는 최선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정 때문에 손해를 보는 사람에게도 정말 최선일까요. 그러다 문득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 여섯 명 중 한 명이었다면?'
아마 저는 오디세우스를 영웅이라고 부르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다면 더 억울했을 겁니다. 오디세우스에게는 모두를 살리기 위한 선택이었겠지만, 희생되는 사람에게도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까요. 이 지점부터 저는 오디세우스를 조금 다르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를 계속 보다 보니 또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렇게 머리가 좋은 사람이 왜 굳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폴리페모스에게서 가까스로 탈출해 놓고도 배가 충분히 멀어지자 자신의 본명을 밝히며 상대를 도발합니다. '아무도 아닌 사람(우티스)'으로 살아 나왔던 그가,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세상에 남기겠다는 오만 때문에 모든 안전장치를 스스로 없애버린 순간이었습니다. 그 결과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귀환이 10년이나 더 늦어집니다.
제가 직접 이 장면을 보면서 느낀 것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항상 현명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능력이 뛰어날수록 자신의 판단을 과신하기 쉽고, 여러 번 성공하다 보면 '이번에도 내가 맞을 것'이라는 확신에 빠집니다. 오디세우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지략이었지만, 그 지략에 대한 자신감이 동시에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인물을 완벽한 영웅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능력 때문에 더 위험한 선택까지 할 수 있었던 인간으로 보였습니다. 어릴 때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볼 때는 괴물을 이기고 살아남으면 당연히 영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조금 달랐습니다. 살아남았다는 것과 옳은 선택을 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어서 보니 괴물보다 사람이 내리는 선택이 더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그리스 신화를 전혀 모르고 봐도 이해가 되나요?
A. 제 경험상 사전 지식이 없으면 등장인물 관계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트로이 전쟁이 왜 시작됐는지, 오디세우스가 왜 집에 못 돌아가는지 정도만 알아두면 영화 몰입도가 크게 달라집니다. 핵심 배경만 30분 정도 미리 확인하고 가시길 권합니다.
Q. 아이맥스로 봐야 하나요, 일반 상영으로 봐도 되나요?
A. 제가 직접 관람하면서 만족했던 부분은 화면의 크기 자체보다 공간감과 사운드였습니다. 다만 모든 상영관을 비교해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무조건 아이맥스가 정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가능하다면 화면과 음향 시설이 좋은 상영관에서 경험해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Q. 영화 상영 시간이 얼마나 되나요? 중간에 화장실 가기 어렵나요?
A. 상영 시간이 상당히 깁니다. 제가 본 날 상영관 안에서 중간에 자리를 뜨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는데, 영화 자체의 흡입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리 준비를 해두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음료 섭취량을 조절하고 입장 전 화장실을 다녀오시길 권합니다.
Q. 원작 오디세이아와 영화 내용이 많이 다른가요?
A. 원작의 모든 내용을 그대로 옮겼다고 보기보다는 영화적으로 재구성된 작품으로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영화를 보기 전에 오디세우스의 귀환 과정과 주요 인물 정도만 간단히 확인하고 갔는데 실제 관람에 꽤 도움이 됐습니다. 원작을 완독하지 않았더라도 기본적인 관계만 알고 가면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부담이 훨씬 적었습니다.
결론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저는 다시 영화관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요즘은 집에서 OTT로 원하는 작품을 언제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이 불이 꺼진 공간에 함께 앉아 아무 말 없이 하나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경험, 모르는 사람들과 비슷한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그 경험은 집에서 쉽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 어디선가 한 분이 박수를 쳤습니다. 순간 저도 따라 치고 싶었습니다. 극장을 나오면서는 여기저기서 “와”, “이게 영화지”라는 말이 들렸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저도 그 대화에 끼어들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가 계속 생각났습니다. 처음 극장에 들어갈 때만 해도 3,500억 원이 들어간 놀란의 대작을 보러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고 나오니 제작비도, 아이맥스도, 거대한 전쟁 장면도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20년을 헤매고도 결국 집으로 돌아온 사람과, 그 사람을 기다린 사람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오디세이》는 단순히 '잘 만든 영화'라는 말만으로는 조금 부족합니다.
8월 8일 오전, 제가 왜 영화관을 좋아했는지 오랜만에 다시 떠올리게 해 준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