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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하자."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언젠가는 가장 많이 후회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릅니다.
저도 그 말을 수도 없이 하며 살았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대화를 미루고, 손 한번 잡아드리는 일을 내일로 미뤘습니다. 그러다 영화 〈코튼테일〉을 보고 극장을 나오는데 이상하게 영화의 마지막 장면보다 내년이면 100세를 바라보시는 외할머니 얼굴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지금은 치매 진단을 받으신 외할머니를 어머니와 함께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치매를 앓던 아내를 떠나보낸 켄자브로의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가 아니라, 언젠가 제 가족에게도 찾아올 수 있는 현실처럼 다가왔습니다.
치매 간병이 가족 사이를 어떻게 바꾸는가
켄자브로는 아내 아키코가 알츠하이머(Alzheimer's disease) 진단을 받은 이후 24시간 곁에서 돌봤습니다. 알츠하이머병은 기억력과 판단력이 조금씩 떨어지는 대표적인 퇴행성 치매 질환입니다. 중앙치매센터가 발표한 2016년 전국 치매역학조사에서는 알츠하이머 치매가 전체 치매의 74.4%를 차지한 것으로 보고됐습니다 (출처: 중앙치매센터). 켄자브로는 아들 토시에게 아키코의 상태를 숨기려 했고, 그 침묵이 쌓여 부자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 봤는데, 간병하는 사람이 "가족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으로 혼자 끌어안으면 오히려 관계가 더 단단히 닫혀버립니다. 어머니는 하루에도 수십 번 같은 질문에 대답하시면서도 저 앞에서는 "별거 아니야"라고 하십니다. 저도 퇴근하고 나서 할머니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 하루 마지막 루틴이 됐지만, 그 무게를 선뜻 꺼내놓지 못하는 날이 훨씬 많습니다. 켄자브로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아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혼자 병을 감당하려는 켄자브로의 뒷모습은, 사랑해서 숨긴 침묵이 오히려 가장 큰 오해를 만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주목할 부분은 아키코가 단순히 유골을 호수에 뿌려달라는 부탁만 남긴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녀의 진짜 바람은 남편과 아들이 함께 그 여정을 떠나며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지기능 저하(cognitive decline), 즉 기억과 판단력이 흐려지는 과정을 겪으면서도 아키코는 가족의 관계를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치매 가족들이 가장 많이 겪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간병 부담(caregiver burden)'입니다. 여기서 간병 부담이란 돌봄 제공자가 신체적·정서적·경제적으로 소진되는 복합적 상태를 뜻합니다. 치매 환자를 오랫동안 돌보는 가족은 신체적 피로뿐 아니라 불안과 죄책감, 경제적 부담까지 함께 겪을 수 있습니다. 이를 ‘간병 부담’이라고 합니다. 정부 역시 치매 환자 가족의 부담을 개인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으로 함께 해결해야 할 돌봄 문제로 보고 있으며, 치매 가족 지원 정책과 지역사회 돌봄 확대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출처: 보건복지부).
하지만 이런 용어만으로는 제가 집에서 느끼는 무게를 전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같은 질문에 몇 번이고 대답하다가도 미안한 마음이 들고, 잠깐 혼자 있고 싶다가도 할머니가 보이지 않으면 걱정됩니다. 간병의 어려움은 하나의 숫자보다 이런 상반된 감정 속에 더 가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 알츠하이머: 치매의 가장 흔한 원인 질환으로, 증상을 완화하거나 진행을 늦추기 위한 치료가 시행되지만 현재 완치를 보장하는 치료법은 없음
- 간병 부담(caregiver burden): 장기간 돌봄으로 인해 가족이 신체적·정서적·경제적으로 겪는 복합적인 부담
- 인지기능 저하(cognitive decline): 기억·판단·언어 능력이 점진적으로 줄어드는 과정
- 침묵의 역설: 가족을 보호하려는 고립된 돌봄이 오히려 관계를 단절시킴
후회 없는 이별을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것
켄자브로가 윈다미아 호수 앞에서 아들 토시에게 처음으로 속마음을 꺼내놓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무거운 장면이었습니다. 그때 제 머릿속에 떠오른 건 "저희 가족도 저 대화를 미루고 있는 건 아닐까"였습니다. 어머니는 힘들다는 말을 잘하지 않으시고, 저는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하는 날이 많습니다. 서로 걱정한다는 걸 알면서도 먼저 꺼내는 건 이상하게 어렵습니다.
영화 속 아키코는 일찍이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했습니다. 몇 년 전 절에 맡겨뒀던 편지에는 가족들과 함께 호수에 유골을 뿌려달라는 부탁이 담겨 있었고, 아키코가 남긴 편지는 법적 의미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라기보다, 자신의 마지막을 예상하며 가족에게 남겨둔 삶의 정리이자 마지막 당부에 가깝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유골이 놓일 장소뿐 아니라, 자신이 떠난 뒤 남편과 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까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키코가 남긴 건 유언이 아니라 남편과 아들이 다시 이어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셈입니다.
내년이면 100세를 바라보시는 저희 외할머니는 2023년에 치매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아직 증상이 심하지 않아 아침마다 주간보호센터에 다녀오시지만, 그 하루를 만들기 위해 누군가는 새벽부터 움직여야 합니다. 요양병원에 계실 때보다 지금 집에서 웃으시는 모습을 볼 때 피로가 조금은 풀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제 경험상 이건 단순히 "힘들다 vs 보람 있다"로 정리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두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채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에 가깝습니다.
치매는 다른 병과 결이 다릅니다. 많은 병이 몸을 먼저 무너뜨린다면, 치매는 기억부터 조금씩 지워갑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붙잡으려는 가족의 시간도 함께 길어집니다.
치매를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환자가 했던 말을 잊어버리거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모습만 봅니다. 그러나 가족이 견뎌야 하는 것은 반복되는 질문만이 아닙니다. 어제까지 가능했던 일이 오늘은 어려워질 수 있다는 불안, 잠시 눈을 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긴장, 힘들다는 말을 했다가 환자를 짐처럼 여기는 사람으로 보일까 두려운 죄책감까지 함께 따라옵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치매를 지나치게 어둡고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소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치매라는 진단을 받는 순간, 그 사람의 취향과 감정, 살아온 시간까지 모두 사라진 것처럼 대하는 시선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이 흐려진다고 해서 한 사람의 존엄까지 흐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외할머니는 방금 나눈 대화를 잊으실 때가 있어도 따뜻하게 말을 걸면 웃으시고, 손을 잡아드리면 여전히 안심하십니다.
치매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힘내세요”라는 의례적인 말만이 아닙니다. 약속을 자주 취소하거나 연락이 뜸해졌을 때 사정을 캐묻기보다 기다려주는 태도, 지친 얼굴을 보았을 때 판단하지 않고 “오늘은 괜찮으세요?”라고 물어주는 마음이 더 큰 위로가 됩니다. 치매는 한 가정이 숨어서 감당해야 할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누구의 가족에게든 찾아올 수 있는 삶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치매를 완전히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약은 병의 진행을 늦추기 위해 필요하고, 제도는 가족의 부담을 나누기 위해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따뜻한 시선은 환자와 가족이 세상에서 고립되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또 하나의 돌봄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치매 때문이 아니라, 서로 사랑했는데도 끝내 다 하지 못한 말들이었습니다. 기억은 언젠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 못한 말은 남겨진 사람의 마음속에서 훨씬 오래 남습니다. 이 영화는 그 사실을 아주 조용하게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 가지 다짐한 게 있다면, 치매 환자를 향한 시선을 바꾸는 것은 제도보다 태도에서 먼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기억이 흐려질 뿐, 따뜻한 말 한마디에 미소 짓고 손을 잡으면 안심하는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어머니와 저는 요즘 자주 같은 말을 합니다. "살아계시는 동안만큼은 후회하지 말자."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 조금 더 손을 잡아드리고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드리는 것입니다. 언젠가 이 시간이 끝나더라도 "그때 조금만 더 잘해드릴 걸"이라는 말만큼은 남기지 않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 〈코튼테일〉은 치매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영화인가요?
A. 치매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치매를 앓은 아내를 떠나보낸 뒤 남겨진 가족이 어떻게 서로를 다시 이해하는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알츠하이머 증상 묘사가 등장하지만 의학적 설명보다는 가족 간 감정선이 중심입니다. 치매 관련 가족 영화를 찾고 있다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Q. 치매 환자를 집에서 모시는 게 요양병원보다 나은가요?
A. 이건 환자의 증상 단계와 가족의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외할머니께서 익숙한 집에서 생활하실 때 표정이 한결 편안해지고 일상에도 다시 적응하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다만 가정 돌봄과 시설 돌봄 중 어느 쪽이 더 낫다고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환자의 증상과 안전 문제, 가족의 건강과 돌봄 여건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희 가족처럼 집에서 모시면서 낮에는 주간보호센터의 도움을 받는 방식도 하나의 현실적인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Q. 치매 간병을 하다가 번아웃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솔직히 번아웃이 오기 전에 신호를 알아채는 게 훨씬 중요합니다. 간병 번아웃(caregiver burnout)이란 장기 돌봄으로 인한 극도의 정서적·신체적 소진 상태를 말하는데, 이 상태에 이르면 환자 돌봄의 질도 함께 떨어집니다. 지역 치매안심센터나 정신건강복지센터의 가족 상담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것이 현실적인 첫 단계입니다.
Q. 사전 돌봄 계획은 어디서 어떻게 작성하나요?
A.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19세 이상 성인이 향후 임종 과정에 놓였을 때를 대비해 연명의료에 관한 자신의 의사를 미리 기록하는 문서입니다.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등록기관에서 충분한 설명을 들은 뒤 본인이 직접 작성해야 합니다. 가족에게 남길 말이나 장례 방식, 돌봄에 관한 희망은 별도의 기록으로 함께 정리해둘 수 있습니다.
결론
〈코튼테일〉은 치매를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루지 말아야 할 말을 이야기하는 영화였습니다. 켄자브로가 윈다미아 호수에서 아들에게 처음으로 속마음을 털어놓는 장면에서 저는, 그 대화가 아키코가 살아있을 때 이루어졌더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아마 아키코도 그걸 알았기 때문에 여행이라는 마지막 장치를 남겼겠지요.
저와 어머니는 오늘도 할머니의 하루를 함께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이 시간이 끝날 때, 영화 속 켄자브로처럼 오랜 침묵을 뒤늦게 후회하기보다 지금 조금씩 더 이야기를 나누는 쪽을 택하려 합니다. 이 영화가 마음에 걸리는 분이라면, 혹시 오늘 집에 돌아가게 된다면, 미뤄왔던 말 한마디를 먼저 건네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가장 오래 남는 기억은 특별한 날이 아니라, "잘 다녀왔어?", "밥은 먹었어?" 같은 평범한 한마디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늦게 깨닫곤 합니다.
참고자료
• 중앙치매센터
• 보건복지부
• 영화 코튼테일 공식 예고편(유튜브) : https://www.youtube.com/watch?v=hxuT8Dwlqm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