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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트렁크를 꽃으로 가득 채웠던 날이 있었습니다. 보라색 장미와 안개꽃, 그 가운데 놓인 스니커즈 상자. 《프로포즈》를 보다가 그 장면이 불쑥 떠올랐습니다. 거창한 이벤트보다 상대가 무심코 했던 한마디를 기억해두는 것.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저는 사랑에서 그런 것들이 더 오래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약결혼이라는 설정, 얼마나 현실적일까
《프로포즈》(The Proposal, 2009)는 캐나다 국적의 출판사 편집장 마거릿이 미국에서 계속 일하기 어려워지고 추방 위기에 놓이자, 부하 직원 앤드루에게 위장결혼을 요구하면서 시작됩니다. 현실에서 그대로 실행했다면 이민법상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영화는 이 무리한 설정을 코미디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궁금해졌습니다. 실제로도 결혼한다고 말하면 마거릿처럼 미국에 남을 수 있는 걸까. 영화를 보고 관련 절차를 조금 찾아보니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복잡했습니다. 실제 이민 절차에서도 두 사람의 관계가 진짜인지 확인하는 과정이 중요하지만, 영화는 복잡한 부분을 과감하게 줄이고 두 사람의 거짓말이 들키느냐 마느냐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앤드루와 마거릿이 서로의 취향과 가족 이야기를 급하게 외우는 장면도 다시 보니 마냥 웃기지만은 않았습니다. 들키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둘이 허둥대는 모습에 웃으면서도 묘하게 긴장됐습니다. 법률 영화가 아니라 로맨틱 코미디라는 걸 생각하면 저는 이 정도 과장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 설정이 던지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상사라는 권력관계를 이용해 부하 직원에게 위장결혼을 요구하는 행위, 현실이었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요.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거릿을 응원하고 있었는데, 막상 냉정하게 보면 그 행동은 꽤 심각한 직장 내 갑을관계 문제입니다.
알래스카에서 시작된 무장해제, 그 속도가 문제였을까
마거릿이 앤드루의 가족을 만나 조금씩 무장해제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게 이해됐습니다. 앤드루의 고향인 알래스카 시트카에 도착하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곳에서 마거릿은 앤드루의 할머니, 부모님, 동네 사람들에게 둘러싸입니다.
뉴욕 사무실에서 모두를 압도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보살핌을 받는 쪽'이 됩니다. 저는 오히려 마거릿이 앤드루보다 그의 가족에게 먼저 마음을 빼앗긴 것처럼 보였습니다. 누군가 밥을 챙겨주고, 할머니가 거리낌 없이 말을 걸고, 가족들이 당연하다는 듯 자기들 사이에 자리를 내어주는 경험. 늘 혼자 해결하는 데 익숙했던 사람에게는 그런 평범한 친절이 더 낯설었을 것 같습니다.
저도 나이가 들수록 특별한 위로보다 "밥 먹었어?" 같은 별것 아닌 말에 마음이 풀릴 때가 있어서인지 이 부분은 생각보다 쉽게 이해됐습니다.
그래서 마거릿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까지는 이해됐습니다. 문제는 앤드루와 사랑에 빠지는 속도였습니다. 로맨틱 코미디니까 그러려니 하면서 봤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며칠 전까지 서로 질색하던 두 사람이 이렇게 빨리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남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이 속도가 완전히 납득됐던 건 아닙니다. 회사에서 보여준 마거릿의 행동, 즉 해고한 직원 자리에 앤드루를 앉히겠다고 위협하고 비자 문제를 부하 직원에게 떠넘기는 행위는 며칠의 알래스카 체험으로 상쇄될 만한 수준이 아닙니다. 제가 앤드루였다면 트렁크 가득 꽃을 준비하는 설레는 감정이 아니라, 트렁크에 사직서를 넣어 두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도 영화를 보는 내내 두 사람이 잘 되기를 바랐습니다. 이게 로맨틱 코미디의 묘한 마법입니다. 현실이었다면 "저건 좀 아니지" 했을 장면을 어느 순간 응원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뻔한 해피엔딩이 오히려 반갑게 느껴진 이유
차 트렁크를 열던 날, 저는 꽃의 개수나 배치보다 그녀가 웃는 순간이 먼저 떠오릅니다. 평소 지나가듯 "저 스니커즈 예쁘다"라고 했던 말을 기억했다가 몰래 준비했다는 걸 알고 더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프로포즈》의 공개 청혼 장면을 보면서 그때 기억이 겹쳤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서로를 못마땅해하던 두 사람이었는데, 앤드루는 어느 순간부터 마거릿이 강한 척하면서 감추고 있던 모습까지 보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좋아한다는 건 남들이 그냥 지나친 그 사람의 작은 표정이나 한마디를 기억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결말은 어렵지 않게 예상했습니다. 마거릿이 거짓말을 털어놓고 떠나는 순간부터 '이제 앤드루가 잡으러 가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뻔하다고 해서 재미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으면서도 빨리 따라가라고 마음속으로 앤드루를 재촉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재미는 결말을 맞히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결말까지 얼마나 기분 좋게 데려가느냐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09년에 나온 영화인데 지금 다시 봐도 웃기는 장면이 꽤 많았습니다. 라이언 레이놀즈는 이런 역할을 참 잘합니다. 잘생긴 배우인데 이상하게 억울한 표정을 지을 때가 제일 웃깁니다. 마거릿에게 한마디 하고 싶지만 꾹 참는 얼굴이나 일이 꼬일 때마다 '왜 하필 나야' 하는 듯한 표정을 보고 있으면 대사가 없어도 웃음이 납니다. 산드라 블록이 강하게 밀어붙이고 라이언 레이놀즈가 받아치는 호흡도 좋아서, 저는 로맨스보다 두 사람의 말싸움을 보는 재미가 더 컸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뻔한 결말이 예전보다 더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현실의 사랑이 영화처럼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된 나이가 됐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두 시간 동안만큼은 그런 뻔한 이야기를 믿어보고 싶었습니다. 그 정도의 거짓말이라면 가끔은 속아줘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처럼 위장결혼 여부를 실제로 조사하기도 하나요?
A. 영화는 실제 이민 심사를 코미디에 맞게 많이 단순화하고 과장합니다. 실제 절차에서도 결혼 관계가 진짜인지 확인하는 과정이 중요하지만, 영화 속 조사 장면을 그대로 현실의 심사 방식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Q. 산드라 블록과 라이언 레이놀즈 케미가 진짜 좋은가요?
A. 제가 직접 보니 티격태격하는 장면의 호흡이 특히 좋았습니다. 산드라 블록의 날카로운 상사 연기와 라이언 레이놀즈의 황당해하는 표정이 맞물리면서, 언제 사랑에 빠졌는지를 따지기보다 그냥 그 과정을 따라가게 됩니다. 특히 욕실에서 둘이 부딪히는 장면은 내용을 알고 다시 봐도 웃겼습니다. 두 배우가 망가지는 걸 전혀 아끼지 않아서 가능한 장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Q.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싫어하는데 이 영화도 비슷한가요?
A. 로맨틱 코미디보다 코미디에 더 가깝다고 보면 됩니다. 저는 사랑 이야기보다 강아지 소동이나 가족들과 부딪히는 장면에서 더 많이 웃었습니다.
결론
마거릿 같은 상사를 현실에서 만났다면 저는 앤드루처럼 사랑에 빠지기 전에 회사를 그만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랐습니다. 아마 현실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일을 두 시간 동안 믿게 해주는 게 로맨틱 코미디의 재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저는 오래전 차 트렁크를 열던 순간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보라색 장미와 안개꽃 사이에 숨겨둔 스니커즈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던 여자친구의 얼굴입니다. 그날 제가 준비한 건 꽃과 신발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기억에 남은 건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무심코 했던 말을 기억해 두었다가, 그 사람을 한번 웃게 해주고 싶었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프로포즈》가 뻔해서 좋았습니다. 현실에서는 사랑이 이렇게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 가끔 두 시간 정도는 이런 결말을 믿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