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론에게 심장약을 먹이기 시작한 지 3년이 되어갑니다. 비대성 심근병증(HCM) 진단을 받던 날, 의사가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을 때는 병명보다 ‘평생’이라는 단어가 더 무겁게 들렸습니다. 《도그 스타: 마지막 희망》을 본 뒤에도 종말의 풍경보다 바론의 약을 준비해온 시간이 더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영화 속 힉이 재스퍼를 지키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힉이 재스퍼를 놓지 못하는 이유대재앙이 지나간 뒤 힉은 반려견 재스퍼, 무장한 생존주의자 뱅리와 고립된 비행장에서 살아갑니다. 힉은 경비행기로 주변을 살피고 물자를 구하며, 뱅리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거처를 지킵니다. 두 사람은 함께 생존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그 사이에서 재스퍼는 먹이고 보호해야 할 반려견 이상의 존재가 됩..
누군가 반대하면 평범했던 감정도 갑자기 특별해질 때가 있습니다. 《엔들리스 러브》를 보면서 저는 두 사람의 사랑보다 그 사랑이 뜨거워지는 과정에 더 눈이 갔습니다. 4년 동안 바라만 보던 관계가 아버지의 반대 이후 반드시 지켜야 할 사랑으로 변합니다. 아무도 막지 않았다면 데이빗과 제이드는 서로를 이토록 간절하게 원했을까요.평범한 첫사랑에 벽이 생긴 순간데이빗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제이드를 멀리서 바라봤지만 졸업할 때까지 제대로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시작된 계기도 거창하지 않습니다. 졸업을 축하하던 날 우연히 다시 마주쳤고, 먼저 말을 건 사람은 제이드였습니다.함께 춤을 추고, 가족과 식사하고, 여름을 보내는 모습은 아직 서로를 알아가는 첫사랑에 가까웠습니다. 데이빗이 오랫동안 제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가 완벽할 수 있을까요. 《퍼펙트 데이즈》를 처음 봤을 때 저는 그 질문 앞에서 오래 멈췄습니다. 도쿄의 공공 화장실을 청소하는 중년 남자 히라야마. 매일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같은 일을 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나무를 바라봅니다. 처음에는 이런 삶이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날 무렵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제가 계속 바라보게 된 것은 평온한 히라야마가 아니라, 그 평온함이 깨질 때마다 달라지는 그의 얼굴이었습니다.코모레비, 같은 나무를 매일 찍는 이유히라야마는 점심시간이면 필름카메라를 꺼내 나무를 찍습니다. 정확히는 나뭇잎과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봅니다. 일본어로 이런 빛을 코모레비(木漏れ日)라고 부릅니다.처음에는 꽤 감성적인 장면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거울 앞에서 실감된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달랐습니다. 어느 날 후배가 불량품 하나를 들고 제 자리로 찾아와 “이거 어디부터 확인하면 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별것 아닌 질문이었는데 후배가 돌아간 뒤 한동안 그 말이 남았습니다. 예전에는 저 질문을 하던 사람이 저였기 때문입니다. 영화 《리버럴 아츠》를 보면서 그날의 장면이 다시 떠올랐습니다.나이는 거울보다 역할이 바뀔 때 보였다품질 관리 업무를 오래 하면서 나이를 숫자로 의식한 적은 많지 않았습니다. 해가 바뀌면 경력이 하나씩 늘었지만 어제의 저와 오늘의 제가 갑자기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그런데 후배가 불량품을 들고 찾아왔던 날은 조금 달랐습니다.저는 제품을 보면서 발생 시점을 먼저 확인하고, 정상 제품과 어떤 차이가..
맛있다고 했던 도라야키가 하루아침에 외면받았습니다. 음식이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알게 된 정보 하나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앙: 단팥 인생 이야기》를 보고 나서 제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었던 것은 단팥의 달콤함보다 다른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직접 보고 판단하는 걸까. 아니면 먼저 들은 이야기에 맞춰 그 사람을 다시 보고 있는 걸까.팥 하나로 달라진 가게에서 먼저 보인 것센타로는 작은 도라야키 가게에서 일합니다. 좋아서 선택한 일이라기보다 빚 때문에 가게에 묶여 있다는 표현이 더 가까워 보입니다. 팥앙금도 직접 만들지 않고 업소용 제품을 사용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70대의 도쿠에 가 찾아와 자신을 아르바이트로 써달라고 부탁합니다.센타로는 처음부터 반기지 않습니다. 나이가 많고 손가락..
새 회사에서 처음 작성한 보고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앉기를 반복했습니다. 이전 회사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누구에게 먼저 알리고 어떤 자료를 준비해야 하는지 몸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보고서 내용보다 보고 순서가 더 어려웠습니다. 그때 몇 달 뒤의 결과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이 망설임도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2020년 공개된 일본 SF 코미디 《드로스테 저편의 우리들》은 바로 그 상상을 2분이라는 짧은 시간 차이로 보여줍니다. 미래를 먼저 알게 되면 사람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미 본 장면을 따라가며 현재를 잃게 될까요.보고서를 들고일어나지 못했던 이유경력자로 새 회사에 들어갔지만 모든 것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됐습니다. 같은 품질 문제라도 보고해야 할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