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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크롤러, 선을 넘을수록 성공한 이유

dailyroutine15 2026. 8. 16. 22:45

목차


    나이트크롤러

    《나이트크롤러》를 보는 동안 저는 루이스 블룸이 언제 무너질지만 기다렸습니다. 사고 현장을 조작하고, 경찰보다 먼저 도착한 범죄 현장에서 피해자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나중에는 범죄가 벌어질 상황까지 자신의 촬영에 유리하게 이용합니다. 이 정도면 마지막에는 당연히 대가를 치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제 예상을 완전히 비껴갑니다. 루이스는 잡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직원들을 고용하고 촬영 차량까지 늘려 사업을 키웁니다. 그때부터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루이스 블룸은 어떻게 저렇게까지 선을 넘고도 성공할 수 있었을까.

    처음부터 괴물이었던 남자보다 더 무서웠던 것

    영화 초반부터 루이스는 절도와 폭력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뉴스 업계에 들어가 사람의 불행을 팔겠다는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통사고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사람들을 발견합니다. 찍은 영상을 방송국에 판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의 관심이 달라집니다.

    저는 이 장면이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루이스가 정의로운 기자가 되고 싶어서 이 일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 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가 발견한 것은 훨씬 간단합니다.

    “이게 돈이 되는구나.”

    처음에는 장비도 경험도 부족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고통 앞에서 머뭇거리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누구보다 빠르게 이 일에 적응합니다. 사고 피해자가 눈앞에 있어도 카메라를 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찍은 영상이 실제 뉴스에 나오는 모습을 확인하면서 무엇이 돈이 되는지 배워갑니다.

    그래서 저는 루이스를 단순히 ‘소시오패스’라는 단어 하나로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방송국이 평범했던 사람을 괴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더 무서웠던 건 따로 있었습니다. 원래부터 선을 쉽게 넘던 루이스에게 이 일이 계속 “그래도 된다”라고 답해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루이스 한 사람만 이상하다고 결론 내리면 이야기는 편해집니다. 그 사람만 욕하고 영화를 끝내면 되니까요. 하지만 《나이트크롤러》는 그렇게 빠져나갈 구멍을 주지 않았습니다.

    선을 넘을 때마다 누군가는 돈을 더 줬다

    루이스의 행동은 점점 심해집니다. 사건 현장에 먼저 도착하는 것으로 부족해지자 이제는 현장 자체를 건드리기 시작합니다. 사고 현장의 위치와 구도를 자기 마음대로 바꾸면서 더 자극적인 화면을 만들어냅니다. 저는 이 순간부터 그의 카메라가 사건을 기록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장면을 만드는 도구로 바뀌었다고 봤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여기에서 누군가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입니다.

    루이스가 선을 넘을수록 방송국 프로듀서 니나는 그의 영상을 더 원합니다. 더 충격적인 화면은 더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고 방송에서 더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루이스 입장에서 보면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어제보다 더 잔인한 영상을 가져왔더니 더 큰 보상이 돌아왔으니까요.

    저는 이 부분에서 영화가 꽤 잔인하다고 느꼈습니다. 루이스에게 “그렇게 살면 언젠가 벌을 받는다”라고 가르치는 대신, “그렇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경험을 계속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루이스의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시스템이 그에게 보상했다고 해서 사람을 이용하고 위험에 빠뜨린 행동까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봅니다. 루이스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고, 그 결과가 누구에게 피해를 줄지도 점점 더 잘 압니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루이스 한 사람을 욕하고 끝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그보다 그에게 계속 돈을 주는 사람들이 더 걸렸습니다. 괴물 같은 행동을 했다는 사실과 그런 행동이 시장에서 보상받았다는 사실이 동시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니나는 피해자가 아니라 루이스에게 가격표를 붙인 사람이다

    그래서 저는 루이스만큼 니나를 유심히 보게 됐습니다.

    니나는 루이스처럼 직접 사고 현장을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사람을 옮기지도 않고 범죄 현장에 들어가 카메라를 들이대지도 않습니다. 겉으로 보면 두 사람 사이에는 분명한 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루이스가 가져온 화면에 가격을 매기는 사람은 니나입니다.

    어떤 사건이 뉴스가 될 만한지, 어떤 피해자의 모습이 시청자를 붙잡을지 판단하고 그것을 방송합니다. 그래서 저는 니나를 루이스와 완전히 떨어뜨려 놓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직접 카메라를 들지는 않았지만, 루이스가 가져온 화면을 선택하고 계속 값을 매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더 무서운 건 서로가 서로를 바꾼다는 점입니다. 니나는 더 강한 영상을 요구하고, 루이스는 그 요구보다 한발 더 나아간 장면을 가져옵니다. 그렇게 기준선이 조금씩 밀립니다.

    처음에는 사고를 촬영합니다.
    다음에는 현장을 건드립니다.
    나중에는 사건 자체가 카메라에 가장 잘 담길 순간을 기다립니다.

    그쯤 되면 취재와 연출의 경계가 거의 사라집니다.

    그리고 저는 이 과정이 루이스 개인의 광기보다 더 섬뜩했습니다. 한 사람의 윤리적 기준이 무너지는 것보다 그 기준이 무너질 때마다 누군가 돈을 지불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SNS를 열었는데 이번에는 제 손가락이 보였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습관처럼 SNS를 열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별생각 없이 화면을 내렸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 제목부터 눈에 들어왔습니다.

    ‘충격 근황’, ‘결국 터졌다’, ‘현재 난리 난 이유’.

    저도 이런 제목이 낚시성이라는 걸 알면서 눌러본 적이 있습니다. 막상 들어가 보면 제목만큼 대단한 내용도 아닙니다. “또 낚였네”라고 생각하면서 화면을 닫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비슷한 제목이 보이면 또 손가락이 잠깐 멈춥니다.

    《나이트크롤러》를 보고 나니 그 행동이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2014년의 루이스는 영상을 팔기 위해 방송국을 찾아가야 했습니다. 지금 제 손 안의 화면에서는 과정이 훨씬 짧아졌습니다. 누군가 찍은 다툼이나 사고 영상 아래 조회수가 붙고, 몇 시간 뒤에는 비슷한 영상이 또 추천됩니다. 《나이트크롤러》를 본 직후라 그런지 그 숫자가 전과는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여기서 “그러니까 시청자도 루이스와 똑같은 공범이다”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건 지나친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극적인 제목 하나를 클릭한 사람과 피해자를 이용해 영상을 만든 사람의 책임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무엇을 취재하고 편집해 내보낼지 결정하는 언론과 콘텐츠를 추천하고 확산시키는 플랫폼에는 소비자보다 훨씬 큰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비자의 선택이 완전히 무관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적어도 저는 무엇에 자꾸 손가락을 멈추는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제가 클릭한 화면이 별것 아닌 숫자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숫자가 모여 “사람들은 이런 걸 본다”는 판단이 만들어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영화를 보기 전이었다면 그냥 넘겼을 숫자인데, 그날은 제가 그 숫자 하나를 보태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찜찜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니까 보여준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여기서 영화에 대한 제 생각도 조금 갈립니다.

    자극적인 뉴스가 계속 만들어지는 데 시청자의 관심도 영향을 준다는 해석에는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시청자가 원하니까 방송한다”는 논리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저부터도 평범한 제목보다 ‘충격’, ‘논란’, ‘사고’ 같은 단어가 붙은 화면에서 한 번 더 멈출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호기심이 피해자의 고통을 어디까지 보여줘도 되는지 결정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클릭이 많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더 자극적인 제목과 영상을 밀어붙인다면 책임을 소비자에게 돌리는 편리한 핑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나이트크롤러》에서 니나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루이스에게는 분명 멈출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동시에 니나에게도 “이 화면은 방송하지 않겠다”라고 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둘 다 멈추지 않습니다. 한쪽에는 돈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시청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시청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다 보고도 누구 하나만 탓하고 끝내기가 어려웠습니다. 루이스를 가장 크게 비난하면서도, 방송국과 시청자의 선택까지 완전히 떼어놓고 보기는 힘들었습니다. 그 안에 제 클릭도 하나쯤 들어 있었으니까요.

    왜 영화는 루이스에게 벌을 주지 않았을까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동시에 가장 불쾌했던 부분은 결말입니다.

    일반적인 범죄 영화였다면 루이스가 쌓아온 행동이 마지막에 자신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그런 결말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니까요.

    하지만 루이스는 살아남습니다.

    그것도 겨우 살아남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업을 확장하고 새로운 직원을 고용합니다. 영화 초반 혼자 낡은 장비를 들고 뛰어다니던 남자가 이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방식을 가르치는 위치에 올라섭니다.

    저는 이 결말을 ‘결국 악이 이겼다’는 이야기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분명 잘못된 일을 하고 있는데도 결과만 좋으면 성공한 사람처럼 취급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불편하게 남았습니다.

    그래서 루이스가 마지막에 체포됐다면 오히려 이 영화는 덜 무서웠을 것 같습니다.

    경찰차에 타는 루이스를 보면서 “역시 저런 인간은 벌을 받는구나” 하고 안심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영화는 그 안도감을 주지 않습니다.

    카메라는 하나에서 여러 개가 됩니다.

    그게 저는 총이나 피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괴물은 정말 루이스 블룸 한 명뿐이었을까

    처음 영화를 볼 때 제가 가장 싫어한 사람은 당연히 루이스였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보고 나니 질문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그렇다고 이 셋의 책임을 똑같이 나눌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 부분만큼은 분명히 선을 긋고 싶습니다. 클릭 한 번과 사람의 죽음을 돈으로 이용하는 행동을 같은 자리에 놓는 순간 오히려 책임의 크기가 흐려집니다.

    다만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나이트크롤러》를 보고 난 뒤 저는 루이스 블룸을 특별한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게 가장 편한 감상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괴물을 화면 안에 가둬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SNS를 다시 열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루이스는 카메라를 들고 있습니다.
    니나는 그 화면을 삽니다.
    방송사는 그것을 내보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클릭합니다.

    저도 그 마지막 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이트크롤러》를 보고 제가 바꾼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자극적인 제목을 절대로 클릭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손가락이 멈추는 순간 한 번쯤 생각하게 됐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싶은 걸까. 그리고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다음 루이스 블룸에게 어떤 가격표를 붙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