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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볼루셔너리 로드》가 끝났는데도 바로 화면을 끄지 못했습니다. 크게 슬픈 장면 하나 때문이라기보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쏟아냈던 말들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분명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언제부터 상대의 얼굴만 봐도 답답해진 걸까. 처음에는 결혼생활이 두 사람을 바꿔놓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장면들을 다시 떠올릴수록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두 사람이 갑자기 변했다기보다, 함께 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사랑할 때는 보이지 않았던 모습과 서로에게 기대했던 환상이 하나씩 벗겨지는 과정처럼 느껴졌습니다.
두 사람에게 파리는 도시가 아니었다
프랭크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회사생활을 이어가고 있고, 에이프릴은 배우를 꿈꿨지만 가정주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생활이지만 두 사람은 자신들이 결국 평범한 교외의 부부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처음에는 저도 이 계획이 멋있게 보였습니다. 싫은 직장을 떠나고, 새로운 도시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그런데 조금 지나자 이상했습니다. 두 사람은 파리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보다 지금 있는 곳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더 많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게 파리는 목적지보다 탈출구에 가까웠습니다.
이 부분에서 제 회사생활이 떠올랐습니다. 저도 한 회사에서 오래 일했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해진다는 것이 편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반대로 답답해졌습니다. 비슷한 시간에 출근하고, 익숙한 사람을 만나고, 어제와 비슷한 문제를 해결하는 생활이 반복됐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회사로 가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마침 지금보다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결국 이직했습니다. 당시에는 꽤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연봉까지 높아졌으니 적어도 한 걸음 앞으로 가는 선택이라고 믿었습니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보면서 그때의 새로운 회사가 저에게는 작은 '파리'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봉은 올랐는데 하루는 더 불편해졌다
막상 회사를 옮겨보니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씩 나타났습니다.
이전 회사에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았던 업무를 새로운 곳에서는 다시 익혀야 했습니다. 사람마다 일하는 방식도 달랐고, 제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기준이 그곳에서는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구에게 먼저 이야기해야 하는지, 어떤 순서로 풀어야 하는지조차 처음부터 다시 알아가야 했습니다.
연봉명세서에 찍히는 숫자는 분명 커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루는 더 불편해졌습니다.
그때부터 전에 다니던 회사가 생각났습니다.
다닐 때는 그렇게 답답했던 곳인데 떠나고 나니 다른 것들이 보였습니다. 함께 오래 일한 사람들,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관계, 문제가 터졌을 때 어디부터 확인해야 하는지 몸으로 알고 있다는 것. 심지어 회사의 단점을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까지 새로운 곳에서는 가질 수 없는 편안함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전 회사가 갑자기 좋은 회사가 된 것은 아닙니다. 싫었던 부분은 여전히 싫었습니다. 다만 떠나기 전에는 너무 익숙해서 그것들이 가진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영화 속 에이프릴에게 공감하면서도 완전히 동의하지는 못했습니다.
프랭크와 에이프릴이 정말 파리에 갔다면 행복했을까요?
저는 새로운 곳으로 실제로 가봤기 때문에 이 질문에 쉽게 그렇다고 답하지 못하겠습니다. 장소를 바꾸면 환경은 달라집니다.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불만과 관계의 문제가 자동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결국 원래 회사로 돌아왔다
저는 결국 이직했던 회사를 나와 원래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돌아가는 과정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더 좋은 조건을 찾아 제 발로 떠났다가 다시 같은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니까요. 처음에는 한 바퀴 돌고 제자리로 온 것 같아서 멋쩍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출근해서 예전에 보던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서 일하다 보니 묘한 차이가 느껴졌습니다. 회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제가 보는 방식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익숙해진다는 것 자체를 제자리걸음처럼 생각했습니다. 돌아온 뒤에는 그것이 오랫동안 쌓인 경험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렇다고 익숙한 곳에 계속 머무는 것이 무조건 옳다는 뜻도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한번 떠나봤기 때문에 제가 직장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전보다 조금 더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프랭크가 회사의 승진 기회를 받아들이려는 모습을 무조건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익숙한 생활을 싫어하는 것과 실제로 그것을 모두 버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에이프릴을 철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녀에게 파리는 단순한 해외 이주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을 겁니다. 그 가능성이 사라지는 순간을 현실적인 판단 하나로만 설명하기에는 그녀가 느끼는 절망이 너무 큽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두 사람 모두에게 조금씩 동의하고, 또 조금씩 반박하고 싶었습니다. 에이프릴은 새로운 장소에 너무 많은 희망을 걸었고, 프랭크는 현재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를 점점 더 많이 찾았습니다.
정작 두 사람이 충분히 이야기하지 못한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지금의 삶이 이렇게 싫어졌을까.'
마지막 아침 식사가 싸움보다 무서웠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격렬하게 소리치는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큰 싸움이 지나간 다음 날, 에이프릴은 너무나 평온하게 아침 식사를 준비합니다. 프랭크도 그 모습을 보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느 정도 진정됐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장면이 오히려 무서웠습니다.
전날까지 감정을 쏟아내던 사람이 갑자기 너무 차분해졌기 때문입니다. 케이트 윈슬렛은 이 장면에서 큰 행동을 하지 않는데도 에이프릴이 이미 프랭크와는 전혀 다른 곳에 서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케이트 윈슬렛은 《레볼루셔너리 로드》로 2009년 골든글로브 드라마 영화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런던비평가협회에서도 《더 리더》와 이 작품의 연기로 Actress of the Year에 선정됐습니다.
마이클 섀넌이 연기한 존 기빙 스도 기억에 남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불편하게 여기지만, 정작 그는 프랭크와 에이프릴이 애써 외면하려는 부분을 거침없이 건드립니다. 저는 그가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인물이라기보다, 다른 사람들이 예의를 지키느라 하지 못하는 말을 그냥 해버리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워드 기빙스가 아내 헬렌의 이야기를 듣다가 보청기를 꺼버리는 장면도 재미있으면서 씁쓸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 끄는 장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차단하는 행동이 프랭크와 에이프릴의 관계와 묘하게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많이 싸웠는데도 정작 상대가 무엇 때문에 무너지고 있는지는 끝까지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결말을 보고 에이프릴에게 동의할 수 없었던 부분
결국 파리 계획은 무너지고 에이프릴은 집에서 스스로 임신 중절을 시도한 뒤 심각한 출혈을 겪습니다. 그녀는 병원으로 옮겨지지만 끝내 세상을 떠납니다.
저는 에이프릴이 느낀 절망 자체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파리를 포기하는 일이 그녀에게는 이사 계획 하나를 접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했던 삶까지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에이프릴이 감수한 위험까지 낭만적으로 바라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컸는지는 이해하지만, 그 절박함이 결국 자신의 몸까지 위험에 빠뜨렸다는 사실 때문에 이 장면은 더 불편하게 남았습니다.
프랭크 역시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조건을 따지는 것은 필요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에이프릴이 왜 그렇게까지 현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지를 듣기보다 자신의 선택을 설명하는 데 더 몰두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한쪽을 피해자나 가해자로 정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지 않아서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기대했던 모습과 자신들이 꿈꾸던 삶이 현실과 너무 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영화 초반의 두 사람도 다르게 보였습니다. 결혼생활이 두 사람을 완전히 바꿔놓았다기보다, 함께 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연애할 때는 보이지 않았던 모습까지 하나씩 보이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보지 않은 파리는 끝까지 완벽하게 남는다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결국 파리에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실제로 행복했을지, 몇 년 뒤 다시 같은 문제로 싸웠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가지 못했기 때문에 파리는 끝까지 실패하지 않은 삶으로 남습니다.
저에게는 조금 다른 결말이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던 곳으로 실제로 떠나봤고, 그곳의 불편함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원래 회사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고 제 이직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떠나지 않았다면 이전 회사의 단점만 계속 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밖으로 나갔다 돌아온 뒤에야 제가 무엇을 싫어했고, 무엇에는 이미 너무 익숙해져 있었으며,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조금은 구분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파리를 보면서 저는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용기보다 다른 질문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정말 새로운 삶일까. 아니면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뿐일까.
예전과 똑같은 회사로 돌아온 뒤 같은 출근길을 다시 다니고 있습니다. 길도 그대 로고 회사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 떠났다가 돌아온 제 눈에는, 그 길이 전과 완전히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관람 후 궁금했던 세 가지
Q. 레볼루셔너리 로드 결말에서 에이프릴은 어떻게 되나요?
A. 에이프릴은 집에서 스스로 임신 중절을 시도한 뒤 심각한 출혈을 겪고 병원으로 옮겨지지만 결국 사망합니다. 저는 이 결말을 단순히 ‘꿈이 좌절돼 비극을 맞았다’고 정리하기보다, 에이프릴이 자신이 꿈꾸던 삶과 현재의 삶 사이에서 점점 출구를 찾지 못하게 되는 과정까지 함께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실제로 파리로 가나요?
A. 아닙니다. 프랭크에게 회사에서 새로운 기회가 생기고 에이프릴의 임신까지 겹치면서 계획은 흔들립니다. 두 사람이 결국 파리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파리는 현실의 도시라기보다 '살아보지 못한 다른 인생'처럼 영화에 남습니다.
Q. 케이트 윈슬렛은 이 영화로 골든글로브를 받았나요?
A. 네. 케이트 윈슬렛은 《레볼루셔너리 로드》로 2009년 골든글로브 드라마 영화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