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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썬, 오래된 사진 속 아버지

dailyroutine15 2026. 8. 18. 15:50

목차


    애프터썬

    솔직히 저는 《애프터썬》을 보면서 한동안 영화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이건 줄거리가 슬픈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서랍 속 오래된 사진들을 꺼내게 된 것도 그날 밤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날 이후 제가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왜 이 영화가 단순한 성장 드라마가 아닌지에 대해 씁니다.



    캠코더가 남긴 것과 남기지 못한 것

    《애프터썬》은 이혼한 아버지 캘럼과 열한 살 딸 소피가 터키로 짧은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여행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가 아닙니다. 그 여행을 20여 년이 지난 뒤, 어른이 된 소피가 어떻게 기억하고 있느냐입니다.

    영화는 과거의 여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시간 순서대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래된 캠코더 영상과 현재의 소피, 기억처럼 떠오르는 장면들이 서로 섞여 들어옵니다. 시작 장면에서 현재의 소피가 오래된 캠코더 영상을 틀어놓고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녀의 생일 아침이고, 바닥에는 20년 전 터키에서 아버지가 사 온 카펫이 깔려 있습니다.

    저도 이 장면에서 잠깐 멈칫했습니다. 카펫 하나가 20년 전 아버지와의 시간을 다시 불러온다는 설정이 이상할 만큼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저도 대청소를 하다가 오래된 사진 상자를 꺼내면 한동안 청소를 멈추곤 합니다. 예전에는 사진 속 제 얼굴부터 찾았는데, 요즘은 이상하게 사진 중앙보다 가장자리를 오래 볼 때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부모님의 옷차림이나 뒤에 서 있던 가족의 얼굴이 이제야 들어옵니다. 그렇다고 그 표정만 보고 당시의 마음까지 알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나는 저 때 이 사람에 대해 정말 아는 게 없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소피가 오래된 캠코더를 다시 보는 마음도 제게는 그쪽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여행 중 남겨진 캠코더 영상은 길지 않습니다. 소피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아버지를 인터뷰하는 영상도 있지만, 흥미로운 것은 그 인터뷰조차 결국 카메라를 돌려 거울 속 자기 자신을 찍는 것으로 끝난다는 점입니다. 당시 소피의 시선이 아버지보다 자기 자신과 새롭게 경험하는 세계를 향하는 것도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열한 살이라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시간이 지난 뒤에야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스무 해가 지나자 노란색이 다르게 보였다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색채 연출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노란색 소품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리조트 직원들이 마카레나 춤을 출 때 입는 노란 유니폼, 수중에서 소피가 입는 노란 잠수복, 그녀가 동경하던 언니에게 넘겨받는 노란 손목 자유이용권, 스쿠버다이빙 때 쓰는 노란 수중 카메라까지.

    저는 반복되는 노란색을 보면서 소피가 말했던 ‘노란 방’을 떠올렸습니다. 그래서 이 색들이 단순히 밝은 휴양지의 색이라기보다, 끝내 갖지 못한 방과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연결하는 색처럼 느껴졌습니다. 실제 과거가 이런 색이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성인이 된 소피의 기억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보면 노란색이 조금 쓸쓸하게 보였습니다. 이상한 것은 기억입니다. 오래된 사진을 다시 봐도 사진 자체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무 살에 보던 사진과 마흔이 넘어 보는 사진은 전혀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바뀐 건 사진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 노란색이냐면, 소피가 여행 중에 아버지한테 이런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빠 집에 가면 내 방 노란색으로 칠할게." 아버지가 런던 근처에 집을 구하면 자기 방을 만들어 준다고 했을 때, 소피가 한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난 뒤 반복되는 노란색을 다시 보니 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소피가 기대했던 미래와 실제로 남은 기억 사이의 거리를 보여주는 색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노란색을 어떤 암호처럼 해석하기보다, 시간이 지난 뒤 기억에 덧입혀진 감정에 가깝게 봤습니다. 즐거웠던 여행의 색인데, 결말을 알고 다시 보면 이상하게 쓸쓸합니다. 같은 장면도 이후에 무엇을 겪었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기억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이 영화와 잘 어울렸습니다.

    보지 못한 것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

    《애프터썬》은 샬럿 웰스의 장편 데뷔작입니다. 그런데 제가 놀랐던 것은 그 이력보다, 별다른 사건 없이 기억의 빈칸을 끝까지 끌고 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규모도 작고 사건도 별로 없는 영화지만, 편집과 연출의 완성도만큼은 데뷔작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출처: IMDb, Aftersun(2022)).

    이 영화가 미학적으로 탁월하다고 느낀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보지 못한 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독창적인 답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보이는 것을 기록하는 매체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정작 중요한 것들, 캘럼의 내면, 그가 숨긴 고통, 딸이 알아채지 못한 순간들은 하나도 직접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장면은 욕실 깁스 씬입니다. 왼쪽 방에서 소피가 성인 잡지 《걸 토크》를 몰래 읽고, 오른쪽 열린 욕실 문 너머에서 캘럼이 팔의 깁스를 가위로 자르려 애씁니다. 방은 노란빛을 띠고, 욕실 쪽은 차가운 푸른빛으로 보입니다. 블루(blue)가 영어에서 우울한 상태를 표현할 때 쓰인다는 점까지 떠올리고 나니, 저는 두 공간의 온도 차이가 캘럼과 소피의 상태를 나누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깁스를 잘못 건드려 팔에 피가 흐릅니다. 소피는 모릅니다. 잡지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까요.

    이 장면이 과거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인지, 성인이 된 소피의 기억과 상상이 섞여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모호함 때문에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느낌과 닮아 있었습니다. 사진 속 굳은 표정을 보고 ‘저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라고 뒤늦게 생각하는 것처럼, 소피 역시 자신이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시간을 기억 사이에서 더듬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상실이 남긴 빈칸을 꼭 채워야 할까

    많은 해석들이 캘럼의 죽음을 중심에 놓습니다. 영화는 여행 이후 캘럼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불안정한 모습과 성인이 된 소피의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이 여행이 두 사람에게 특별한 마지막 기억이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그 빈칸을 하나의 정답으로 채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해석이 나오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이 영화를 그 답을 찾는 방식으로 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캘럼에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퍼즐 맞추듯 분석할수록, 오히려 이 영화에서 제가 좋았던 부분이 흐려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사람을 잃고 나면 남겨진 사람은 자꾸 과거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날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왜 그 표정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내가 조금만 더 자세히 봤다면 달라졌을까. 저는 성인이 된 소피가 캠코더를 돌려보는 모습을 그렇게 봤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영상을 반복해도 새로운 장면은 추가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피가 찾는 것은 과거의 정답이라기보다, 이제는 물어볼 수 없는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 보려는 마음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답답함을 가장 강하게 느꼈습니다. 카메라가 360도로 천천히 회전하면서 현재의 소피가 영상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끊김 없이 공항 속 캘럼의 뒷모습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딸이 떠난 뒤 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집니다. 그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여주지 않습니다. 문이 닫히고 영화가 끝납니다.

    저는 그 결말이 슬프면서도 조금 잔인하다고 느꼈습니다. 열한 살의 소피가 알지 못한 것은 그 나이에 정말로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어쩌면 성인 소피에게 가장 필요한 건 아버지의 마음을 완벽히 알아내는 일이 아니라, 몰랐던 것은 진짜 몰랐던 것이라고 인정하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인정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 영화는 끝내 답을 주지 않고 문만 닫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애프터썬 결말에서 캘럼은 실제로 죽은 건가요?

    A. 영화는 캘럼에게 이후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의 불안정한 모습과 성인이 된 소피가 과거를 되짚는 방식을 근거로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 저는 특정한 결론을 확정하기보다, 소피가 끝내 알 수 없는 아버지의 시간을 바라보는 것이 이 결말에서 더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Q. 영화 속 노란색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 이유가 있나요?

    A. 저는 여행 중 소피가 자신의 방을 노란색으로 칠하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과 연결해서 봤습니다. 이후 반복되는 노란색 소품들이 밝은 휴양지의 색이면서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영화가 그 의미를 하나로 확정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다시 상자에 넣으면서

    《애프터썬》을 보고 난 뒤 오래된 사진을 다시 상자에 넣었습니다. 사진 속 사람들의 마음을 이제 와서 모두 알아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도 예전처럼 제 얼굴만 보고 상자를 닫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은 캘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아니라, 너무 가까이 있어서 오히려 보지 못했던 한 사람의 뒷모습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