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기억은 재개발되지 않았다

dailyroutine15 2026. 8. 20. 08:51

목차


    맨체스터 바이 더 씨

    7~8년 만에 다시 찾아간 동네에서 사라진 골목을 찾다가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눈앞의 풍경은 달라졌는데 제 기억 속 풍경은 그대로였습니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보면서 그때의 감각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에서 리를 괴롭히는 것은 과거의 사건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을 계속 현재로 불러오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돌아왔을 때 기억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을까요.



    예고 없이 들어오는 과거가 오히려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 처음에는 과거 장면이 끼어드는 방식이 조금 낯설었습니다. 현재의 리를 따라가고 있는데 별다른 설명 없이 과거의 장면이 들어옵니다. '몇 년 전'이라는 자막으로 친절하게 구분해주지도 않습니다.

    영화를 따라가는 입장에서는 조금 불친절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수원 남문을 다시 걸었던 날을 떠올리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20대 후반까지 수원 남문에서 살았습니다. 초등학교도 그곳에서 다녔습니다. 그러다 화성행궁 주변이 재개발 지역으로 묶이면서 이사를 하게 됐습니다. 새로 이사한 곳도 남문에서 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예전에 살던 동네를 자주 찾아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7~8년이 지나 다시 갔을 때 남문은 제가 기억하던 모습과 상당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화성행궁 주변에는 맛집과 카페, 공방이 들어섰고 주말이면 사람들이 몰려오는 장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학교 주변을 걷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거리보다 예전 모습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일부러 어린 시절을 회상하려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건물 하나, 길 하나를 보는 순간 사라진 풍경이 현재의 거리 위로 잠깐 겹쳐졌습니다.

    그래서 영화의 플래시백도 단순히 과거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리가 기억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장소와 순간이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과거를 끌어올리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특히 리의 삶을 완전히 바꿔버린 사건을 영화가 마지막 반전을 위해 감춰두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맞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끝난 뒤에도 리가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해 보였습니다.

    남문은 변했지만 제가 기억하는 골목은 그대로였다

    남문에서 가장 오래 서 있었던 곳은 새로 생긴 가게 앞이 아니라 예전에 다니던 학교 주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달라진 거리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저는 반대로 그곳에서 없어진 것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오랜만에 찾아와서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보고 나니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물론 제가 느낀 낯섦과 리가 맨체스터에서 겪는 고통을 같은 선에 놓을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남문은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지만, 리에게 맨체스터는 자신의 삶을 무너뜨린 사건과 연결된 곳입니다.

    다만 장소가 기억을 끌어올리는 방식에서는 공통점을 느꼈습니다.

    기억은 꼭 준비됐을 때 찾아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도 남문에 가기 전까지는 오래전 골목을 떠올릴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주변에 서자 새로 생긴 가게보다 없어진 길부터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리가 맨체스터에서 과거와 계속 부딪히는 모습이 제게는 영화적인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리가 맨체스터를 떠나려는 선택을 단순한 도망이라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패트릭을 생각하면 남아주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리에게 그곳에서 산다는 것은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오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자신이 가장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과 가까이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리의 모든 행동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영화 초반의 리는 쉽게 좋아하기 힘든 사람입니다. 건물 관리인으로서 고장 난 것은 능숙하게 고치면서도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계속 문제를 만듭니다. 세입자에게 퉁명스럽게 대하고 술집에서 싸움을 벌이며 자신에게 가까이 오는 사람까지 밀어냅니다.

    과거가 밝혀지고 나면 그런 행동을 보는 마음도 달라집니다. 왜 이렇게 살아가게 됐는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리의 모든 행동까지 이해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상처는 행동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지만 그 행동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패트릭 때문에 더 그렇게 느꼈습니다.

    패트릭 역시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여자친구를 만나고 밴드 활동을 하고 친구들과 어울립니다. 겉으로만 보면 아버지의 죽음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그러다 냉동고와 관련된 순간에 감정이 갑자기 무너집니다.

    저는 그 장면이 좋았습니다. 사람마다 슬퍼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긴 설명 없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리는 사람들을 밀어내면서 버티고, 패트릭은 일상을 계속하면서 버팁니다. 어느 쪽이 더 슬픈지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리에게 맨체스터를 견디라고 요구하는 것도 잔인하지만, 그렇다고 리의 고통 때문에 패트릭에게 필요한 어른의 역할까지 아무렇지 않게 내려놓아도 된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저는 영화가 이 문제에 정답을 붙이지 않은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랜디가 용서해도 리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

    가장 힘들었던 장면은 리와 전처 랜디가 길에서 다시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랜디는 과거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을 후회하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다른 영화였다면 이 순간이 리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두 사람이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용서하고, 리가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리는 그 마음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저도 답답했습니다. 저 정도로 상대가 다가왔는데 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할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장면 때문에 이 영화가 더 오래 남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용서하는 것과 내가 나를 용서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랜디의 마음이 리의 과거를 없애줄 수도 없습니다. 저는 리가 사건이 끝난 뒤에도 혼자 그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렇다고 저는 그것을 아름답게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과 앞으로 행복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극복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위로만으로 정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리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과 그의 자기 파괴적인 삶까지 옳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이 장면에서 리와 랜디는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좀처럼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두 배우의 연기도 강렬하지만 저는 서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화면이 더 아팠습니다. 같은 사건을 겪었다고 해서 두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나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막이 믿겼다

    저는 영화가 마지막에 리를 갑자기 바꿔놓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패트릭을 만나고 가족의 의미를 깨달은 뒤 모든 상처를 극복한다는 식으로 끝났다면 오히려 지금까지 지켜본 리라는 사람이 거짓말처럼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대신 영화는 아주 작은 움직임만 남깁니다. 리와 패트릭이 함께 걸으며 공을 주고받습니다. 과거는 없어지지 않았고 리가 완전히 회복됐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 정도라서 저는 오히려 믿을 수 있었습니다.

    7~8년 만에 다시 찾아간 남문에서도 제가 기억하던 골목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가게가 생겼고 새로운 사람들이 그곳에서 자기 기억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전 모습을 기억하면서 지금의 거리를 걷는 것뿐이었습니다.

    리에게도 그런 삶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잊는 것도 아니고 괜찮은 척하는 것도 아닙니다.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 기억을 가지고 다음 날을 살아보는 것입니다.

    이 영화의 희망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그래서입니다. 너무 작아서 오히려 과장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보기 전 궁금했던 두 가지

    Q. 케이시 애플렉은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나요?

    A. 네. 케이시 애플렉은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리 챈들러 역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미셸 윌리엄스는 랜디 역으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케네스 로너건은 이 작품으로 각본상을 받았습니다.

    Q. 결말은 희망적인가요?

    A. 저는 '회복'보다는 작은 변화에 가깝다고 봤습니다. 리가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다만 패트릭과 관계를 이어가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모습은 이전과 조금 다릅니다. 모든 것이 좋아졌다는 결말보다 그 정도의 변화라서 저는 더 현실적으로 느꼈습니다.

    장소는 변했는데 기억은 재개발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남문에서 저는 사라진 풍경을 한참 찾았습니다. 결국 찾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왔습니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보고 나니 그날의 기분을 조금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장소는 변했는데 기억은 재개발되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그 기억은 지나간 어린 시절이지만 리에게 맨체스터는 훨씬 견디기 어려운 과거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선택에 전부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왜 그곳에서 살 수 없는지는 이해하게 됐습니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과 마음속 사건이 끝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영화는 리에게 새로운 사람이 되라고 재촉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상처를 멋있게 포장하지도 않는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아주 작은 가능성뿐입니다.

    완전히 괜찮아지지는 못해도 패트릭과 공을 주고받을 정도의 하루는 다시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는 그 정도의 희망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참고 자료
    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 —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후보 기록
    tvN 《홍진경의 영화로운 덕후생활》 EP.92 영화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