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디즈니월드 가까이에 있는 모텔촌에 여섯 살 무니가 살고 있습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고 제가 처음 느낀 것은 연민보다 묘한 거리감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인턴으로 사회에 발을 디뎠을 때 느꼈던 감각과 닮아 있었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다고 해서 같은 출발선에 서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다고 같은 출발선은 아니었다
무니가 사는 매직 캐슬 모텔과 디즈니월드는 멀리 떨어진 두 세계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 영화도 디즈니월드 바깥의 저가 모텔에서 살아가는 무니와 엄마 핼리의 한여름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동안 제게는 그 짧은 물리적 거리보다 두 공간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거리가 더 크게 느껴졌습니다. 누군가는 가족과 휴가를 보내기 위해 이곳을 찾아오고, 누군가는 하루 더 머물 모텔비를 걱정하며 같은 지역에서 살아갑니다.
대학 졸업 후 교수님 추천으로 유명 주얼리 회사에서 인턴을 시작했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처음에는 같은 사무실에서 같은 명찰을 달고 있으니 비슷한 출발선에 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다른 것들이 보였습니다. 주변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대학을 나온 사람도 있었고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미 업계의 언어와 분위기에 익숙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도 라이노로 제품을 모델링하고 드로잉을 만들며 제 몫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때는 부족하면 더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노력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노력하기 전부터 각자 가지고 있던 경험과 기회도 분명 달랐습니다.
그래서 무니가 모텔 주차장과 빈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는 모습이 묘하게 보였습니다. 무니는 자신의 생활을 어른처럼 계산하지 않습니다. 쓰러졌는데도 계속 자라는 나무를 좋아하고, 친구와 돌아다니는 하루를 놀이로 만들어버립니다. 자신의 출발선을 계산하고 있는 쪽은 아이가 아니라 영화를 보는 저였습니다.
핼리를 이해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달랐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판단하기 어려웠던 사람은 핼리였습니다. 모텔비는 계속 필요하고 안정적으로 돈을 벌 방법은 보이지 않습니다. 결국 향수를 팔고 다른 방법으로 돈을 마련하며 하루하루를 버팁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핼리에게 쉽게 "왜 제대로 일하지 않느냐"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 경험에서도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 조건이 모두 같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열 개 있는 사람과 두 개밖에 없는 사람을 놓고 결과만 비교하는 것은 너무 쉬운 판단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는 핼리의 행동을 모두 형편 때문이라고 넘기기도 어려웠습니다.
특히 자신의 선택이 무니의 생활과 안전까지 흔들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출발선이 불공평했다는 사실과 이후의 모든 행동에 책임이 없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봤습니다. 가난은 핼리가 왜 그런 선택까지 몰렸는지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맥락이지만, 아이를 위험에 노출시키는 행동까지 정당하게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이런 생각도 가능합니다. 안정된 집과 직업을 가진 사람이 핼리를 보며 "왜 저렇게 사느냐"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편한 위치에서 내리는 판단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반론에는 동의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동안 핼리를 이해했다가 비판하고, 다시 판단을 미루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오히려 그 불편함이 좋았습니다. 핼리를 불쌍한 피해자로만 만들지도 않고, 무책임한 엄마라는 한마디로 밀어내기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 출발선의 차이는 사람의 선택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맥락이다.
- 하지만 불리한 환경이 모든 행동의 책임까지 없애주지는 않는다.
- 그래서 저는 핼리를 용서하기보다 판단하는 속도를 늦추게 됐다.
삶을 바꿔주지 못해도 곁에 있는 사람, 바비
제게 가장 오래 남은 인물은 의외로 모텔 관리인 바비였습니다. 그는 핼리와 무니를 가난에서 꺼내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돈을 대신 내주지도 않고, 핼리의 삶을 고쳐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모텔비를 받아야 할 때는 냉정합니다. 규칙을 어기면 화를 내고 선을 긋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주변에 수상한 남자가 나타났을 때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아이들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직접 나서서 그 남자를 쫓아냅니다.
저는 이 모습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인턴으로 일하던 시절에도 저를 버티게 했던 것은 누군가 제 인생을 바꿔주는 거창한 도움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만든 결과물을 한 번 더 봐주는 사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감각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바비도 비슷하게 보였습니다. 핼리의 선택을 무조건 받아주지는 않으면서도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길 때는 외면하지 않습니다. 도와준다는 이유로 상대의 삶을 대신 결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비를 보면서 '구원'이라는 거창한 말보다 '자리'라는 단어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누군가의 인생을 바꿔줄 능력은 없어도, 위험한 순간에 자리를 피하지 않는 사람은 될 수 있습니다.
무니가 처음으로 울음을 참지 못했을 때
마지막에 상황이 달라집니다. 어른들은 무니를 현재 환경에서 떼어놓으려 하고, 무니는 친구 잰시에게 달려갑니다. 그동안 모텔촌 전체를 놀이터처럼 뛰어다니던 아이가 그 순간에는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합니다.
어른의 입장에서는 무니를 더 안전한 환경으로 옮기는 것이 합리적인 결정처럼 보입니다. 저 역시 아이의 안전을 생각하면 그 판단을 무조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그 결정을 어른의 설명으로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무니의 얼굴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저는 조금 멈췄습니다.
안전한 결정이 아이에게 곧바로 행복한 결정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른들에게는 보호 조치지만 무니에게는 엄마와 집, 친구와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순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디즈니월드 장면을 저는 현실적인 탈출 장면이라기보다 무니의 감정을 따라가는 순간으로 봤습니다. 영화 내내 가까이 있지만 가질 수 없었던 환상의 공간으로 두 아이가 달려갑니다. 실제인지 상상인지 하나로 못 박기보다, 현실을 감당하기 어려워진 아이에게 영화가 마지막으로 허락한 짧은 도피처럼 느껴졌습니다.
보고 나서 궁금했던 두 가지
Q.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가요?
A. 특정 한 가족의 실화를 그대로 옮긴 작품은 아닙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픽션이지만, 디즈니월드 인근 저가 모텔에 장기간 머물며 생활하는 사람들의 현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의 화려한 색감과 무니의 즐거운 일상 뒤에 있는 주거 불안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Q. 마지막 디즈니월드 장면은 실제인가요?
A. 영화 안에서 현실인지 상상인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느 쪽이라고 단정하기보다, 엄마와 떨어질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무니의 감정을 따라가는 장면으로 봤습니다. 현실적인 가능성보다 아이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했던 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판단하기 전에 출발선을 한 번 더 보게 됐다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고 난 뒤, 저는 사람을 판단하는 데 예전보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졌습니다.
인턴 시절의 저는 같은 사무실에 들어왔으면 그다음부터는 노력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노력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결과만 보고 그 사람이 얼마나 노력했는지까지 쉽게 결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같은 책상에 앉기 전부터 각자가 걸어온 거리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출발선이라는 말로 핼리의 모든 선택을 감싸고 싶지도 않습니다. 무니의 안전까지 흔들리는 순간에는 분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가 제게 어려웠던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해한다고 동의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비판한다고 그 사람의 사정을 지워버려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 다시 떠오른 것은 처음 인턴 사무실에서 봤던 똑같은 명찰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거기까지 오는 길은 모두 달랐습니다.
무니의 모텔과 디즈니월드도 그랬습니다. 지도에서는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그 몇 킬로미터가 이상할 정도로 멀게 느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