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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히든 피겨스, 커피포트가 불편했던 이유

dailyroutine15 2026. 9. 21. 21:56

목차


    히든 피겨스, 커피포트가 불편했던 이유

    《히든 피겨스》에서 제일 먼저 기억에 남은 건 우주선도, 복잡한 계산식도 아니었습니다. 사무실 한쪽에 따로 놓인 커피포트였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목표를 위해 일하는데 물 한 잔을 마시는 순간에도 선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이상하게 그 작은 물건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천재보다 먼저 보인 커피포트 하나

    캐서린 존슨은 어려운 계산을 해내며 조금씩 자신의 자리를 넓혀갑니다. 처음에는 그 과정이 통쾌했습니다. 자신을 제대로 보지 않던 사람들 앞에서 결국 실력으로 답을 보여주니까요.

    그런데 계속 보다 보니 마음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왜 캐서린은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증명한 뒤에야 같은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했을까.

    영화에서는 캐서린이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찾아 먼 거리를 오가는 모습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다만 이 장면을 실제 캐서린 존슨의 경험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편이 좋습니다. NASA의 기록을 보면 당시 랭글리에서 흑인 여성 직원들이 분리된 공간에서 일하고 식사했던 역사가 확인됩니다. 영화는 당시 존재했던 차별을 캐서린의 경험에 집중해 보여주는 방식으로 각색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장면에서 느껴지는 답답함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천재인지 아닌지는 그다음 문제입니다. 화장실을 이용하고 커피를 마시는 데 자신의 가치를 먼저 증명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제가 멈춘 지점: 캐서린의 능력보다, 능력을 보여주기 전부터 당연했어야 할 것들이 먼저 보였습니다.

     

    자신을 대신할 기계를 배운 도로시

    세 사람 가운데 제 시선이 오래 머문 사람은 도로시 본이었습니다. 새로운 컴퓨터가 들어오면서 사람이 직접 하던 계산 업무도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도로시는 기계를 밀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으로 무엇이 필요 해질지를 먼저 보고 프로그래밍을 익힙니다. 더 마음에 남았던 건 자신만 살아남으려고 그 기술을 감추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동료들도 함께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합니다.

    이 부분에는 꽤 동의했습니다. 익숙한 일이 사라질 것 같을 때 변화를 탓하는 것보다 먼저 배우는 선택은 현실에서도 쉽지 않으니까요.

    그렇다고 이 장면을 흔한 자기계발 이야기로 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실력만 있으면 된다"는 말로 정리해 버리면 출발선부터 달랐던 사람들이 감당해야 했던 벽이 사라집니다. 실제 도로시 본은 전자계산 분야와 FORTRAN에 전문성을 갖췄고, 이후 NASA의 통합된 계산 부서에서도 일했습니다. 뛰어난 개인의 노력과 불공정한 환경은 따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상적이었던 선택: 도로시는 변화를 피하지 않았고, 자신이 배운 것을 혼자만의 무기로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통쾌함 뒤에 남은 화장실 표지판

    캐서린이 참아왔던 말을 쏟아낸 뒤 본부장이 화장실 표지판을 없애는 장면은 시원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 장면에서 속이 풀렸습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습니다. 저 표지판은 오늘 붙은 게 아닐 텐데.

    수많은 사람이 매일 그 앞을 지나쳤을 겁니다. 누군가는 불편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오랫동안 그대로 있었다는 사실이 저는 더 무서웠습니다.

    물론 당시의 인종차별을 몇몇 직원의 무관심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제도와 사회 전체에 깊게 자리 잡은 문제였고, 영화처럼 한 사람이 표지판을 없앤다고 해결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의 통쾌함에는 동의하면서도 해결 방식에는 조금 거리를 두게 됩니다.

    메리 잭슨의 이야기도 같은 지점에서 이어집니다. 실제 메리는 엔지니어 교육을 받기 위해 당시 백인만 다니던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특별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후 1958년 NASA 최초의 흑인 여성 엔지니어가 됐습니다. 문제는 그녀가 문을 통과했다는 사실보다 애초에 왜 그 문이 닫혀 있었느냐는 데 있다고 봤습니다.

    다르게 본 장면: 표지판을 없앤 사람보다 그 표지판이 오랫동안 아무렇지 않게 붙어 있었다는 사실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캐서린이 평범한 직원이었다면?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가끔 오래된 방식을 만납니다. 이유를 물었는데 "원래 이렇게 했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올 때도 있었습니다.

    제가 겪은 업무 방식과 영화 속 인종차별을 같은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오래됐다는 이유로 질문 자체가 사라지는 모습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별문제가 없었던 어제의 방식이 오늘도 옳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히든 피겨스》를 보고 난 뒤에는 세 사람의 성공보다 다른 질문이 남았습니다.

    캐서린이 계산을 틀리는 평범한 직원이었다면 어땠을까. 도로시가 새로운 기술을 빨리 배우지 못했다면. 메리가 자신의 주장을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다면.

    그래도 부당한 것은 부당합니다.

    세 사람이 대단해서 차별이 잘못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를 천재 세 명이 NASA에서 인정받는 이야기로만 기억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사무실 구석의 커피포트 하나가 더 오래 남았습니다. 조직에서 가장 고치기 어려운 것은 거창한 규정이 아니라, 너무 익숙해져서 이제 아무도 "왜?"라고 묻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와 실제 기록 사이

    영화와 실제 역사를 구분하기 위해 NASA의 기록을 참고했습니다.

    NASA - Langley의 여성 계산원과 당시 인종분리 기록
    NASA - Dorothy Vaughan Biography
    NASA - Mary W. Jackson Bi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