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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리뷰

아버지의 집밥, 할머니 김치가 생각났다

dailyroutine15 2026. 9. 17. 11:40

목차


    아버지의 집밥, 할머니 김치가 생각났다

    어릴 때는 냉장고를 열면 할머니가 만든 김치가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집에서 먹던 반찬도 대부분 할머니 몫이었습니다. 특별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습니다. 늘 있었으니까요. 지금은 그 김치를 다시 먹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집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상하게 영화 속 음식보다 그 김치가 먼저 생각났습니다.



    밥상에서 가장 편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준익 감독의 《아버지의 집밥》은 고리타의 동명 웹툰을 원작으로 합니다. 정진영이 남편 고하응을, 이정은이 아내 안순애를 연기하고 변요한이 아들 고명복으로 출연합니다. 2026년 9월 9일 롯데시네마에서 개봉했으며, 스마트폰처럼 세로로 긴 화면을 사용하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하응은 오랫동안 순애가 차려주는 밥을 먹으며 살아왔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말하고 밥상 앞에 앉으면 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순애가 요리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그제야 하응이 앞치마를 두릅니다.

    저는 요리를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보다 그전의 식탁이 더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그냥 저녁인데 다른 한 사람에게는 장보기부터 손질, 요리와 뒷정리까지 이어지는 시간이었을 테니까요.

    세로 화면도 처음에는 꽤 낯설었습니다. 긴 시간 좁은 화면을 바라보는 방식이 모든 순간에 잘 맞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짧은 이야기들이 이어지다 보니 비슷한 호흡이 반복된다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다만 하응과 순애가 마주 앉거나 서로의 표정을 살피는 순간에는 달랐습니다. 주변보다 얼굴이 먼저 들어왔고,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거리도 더 가까이서 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김치는 없어졌는데 그때의 나는 남아 있었다

    하응이 밥을 만들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는데 자꾸 어린 시절 우리 집 냉장고가 생각났습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던 우리 집에서는 할머니가 만든 김치와 반찬을 자주 먹었습니다. 냉장고에서 김치가 떨어지면 어느 순간 다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할머니에게 김치 만드는 일이 힘든지 물어본 기억이 없습니다. 맛있으면 먹었고, 반찬이 있으면 당연히 밥상에 올렸습니다.

    지금 할머니는 고관절 수술 이후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려워졌고 치매까지 겪고 계십니다. 예전처럼 김치를 담그거나 반찬을 만들어주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먹을 수 없게 되고 나니 자꾸 생각납니다. 마트에서 김치를 살 때도, 밥을 먹다가 익숙한 반찬을 볼 때도 가끔 그 시절의 맛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순애가 멈춘 뒤에야 부엌으로 들어간 하응을 쉽게 탓하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받는 동안에는 제대로 보지 못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게 남은 장면: 누군가 계속 해주고 있을 때는 평범했던 일이,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되자 전혀 다르게 보였습니다.

     

    몇 번의 집밥으로 지난 시간이 없어질까

    그렇다고 하응이 부엌에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따뜻하게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순애가 계속 건강하게 밥을 차려줬다면 하응은 스스로 칼을 잡았을까요. 몇 번의 요리를 해봤다고 오랫동안 한 사람이 맡아온 수고를 모두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영화를 보는 동안 이 두 가지가 계속 걸렸습니다.

    반대로 늦게라도 알아차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냐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생각에도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지나간 세월을 되돌릴 방법은 없고, 늦었다는 이유로 계속 같은 모습으로 사는 것보다는 지금부터 움직이는 편이 낫습니다.

    다만 저는 하응이 밥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사실과 너무 늦게 시작했다는 사실을 같이 보고 싶었습니다. 앞치마 한 번으로 지난 시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서인지 영화를 다 보고도 하응을 좋다, 싫다 어느 한쪽으로 정리하기 어려웠습니다. 못마땅하게 바라보다가도 어느 순간 제 어린 시절이 겹쳤고, 그러면 다시 말을 아끼게 됐습니다.

     

    다시 먹고 싶은 건 김치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집밥》을 보고 나서 한동안 할머니 김치가 먹고 싶었습니다.

    비슷한 김치는 지금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억하는 맛은 찾기 어렵습니다. 처음에는 손맛이 달라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음식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그리워하는 김치에는 할머니가 직접 움직이고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 수 있었던 시간이 같이 들어 있습니다. 어린 저는 그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밥을 먹었고요. 같은 재료와 같은 방법으로 만든다고 해도 그때 먹었던 김치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영화 속 하응에게도 순애의 밥상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너무 오래 곁에 있어서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없어질 거라고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던 것.

    예전에는 냉장고를 열면 할머니 김치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없습니다.

    《아버지의 집밥》을 보고 나니 제가 다시 먹고 싶은 것은 그 김치보다, 할머니가 아무렇지 않게 김치를 만들어주던 그때의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공식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