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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사람에게는 말하기 어려운데, 다시 볼 일 없는 사람 앞에서는 이상할 만큼 입이 가벼워질 때가 있습니다. 《대디오》의 케이지도 그랬습니다. 뉴욕의 택시 안에서 그녀가 휴대전화 속 연인보다 처음 만난 기사 클라크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이 이상하게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이라 가능한 이야기
케이지는 처음부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승객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휴대전화에는 계속 메시지가 도착하고, 화면을 확인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합니다. 분위기가 바뀌는 건 클라크가 상대 남자가 기혼자라는 사실을 알아챈 뒤부터입니다.
저라면 처음 만난 기사가 연애 문제를 이렇게 깊게 파고들면 "그만하세요"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케이지 역시 불쾌한 기색을 보입니다. 이상한 건 그다음입니다. 입을 닫는 대신 자신의 사정을 하나씩 꺼내놓습니다.
이런 모습을 설명할 때 'stranger-on-the-train'이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관계를 이어갈 부담이 적은 낯선 사람에게 예상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용어보다 케이지의 행동 자체가 더 와닿았습니다. 친한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면 이야기가 그날로 끝나지 않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그래서 어떻게 됐어?"라는 질문을 받을 수 있고, 때로는 자신이 내린 선택까지 설명해야 합니다. 오늘 헤어지고 끝날 사람에게는 그런 다음 장면이 없습니다.
클라크가 믿을 만해서 마음을 연 게 아니라, 어쩌면 아무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건 아닐까요.
휴대전화의 연인보다 불편한 택시기사
케이지는 택시 안에서 전혀 다른 두 사람과 말을 주고받습니다. 휴대전화 속 남자는 그녀를 원한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지만, 메시지가 쌓일수록 케이지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습니다.
운전석의 클라크는 정반대입니다. 듣기 싫은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합니다. 그 남자에게 케이지가 정말 특별한 존재인지, 아니면 그의 삶에서 필요한 부분만 채워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까지 건드립니다. 무례합니다. 동시에 그녀가 피하고 싶었던 곳을 찌릅니다.
그렇다고 클라크의 말을 정답처럼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습니다. 오랫동안 택시를 몰았고 두 번의 결혼을 경험했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의 연애를 몇 마디로 판단할 자격까지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상대 남자가 가족사진과 아이들의 영상을 보여줬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 사이의 한계까지 짐작하는 대목에서는 멈칫했습니다. 경험에서 나온 통찰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실패를 케이지의 상황 위에 겹쳐 놓은 판단일 수도 있습니다.
클라크가 조금 덜 정확했으면 어땠을까요. 한두 번쯤 엉뚱하게 짚었다면 실제 택시에서 만난 수다스러운 아저씨처럼 더 생생했을 것 같습니다.
목적지는 가까워지고 할 말은 많아졌다
그런 결점 때문에 저는 오히려 클라크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모든 답을 알고 있는 현명한 조언자였다면 영화가 훨씬 뻔했을 겁니다. 그는 선을 넘고 자기 경험을 일반화합니다. 그러다가 케이지의 표정이 굳으면 자신의 결혼과 오래된 기억도 슬쩍 꺼내놓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누가 누구를 상담하고 있는지도 애매해집니다. 연애로 시작했던 이야기는 어린 시절과 아버지를 지나 언젠가 해보고 싶은 일까지 흘러갑니다. 케이지 혼자 속내를 털어놓는 자리가 아니게 된 겁니다.
도로가 막히는 장면도 재미있었습니다. 택시는 꼼짝하지 않는데 둘 사이의 이야기는 오히려 앞으로 갑니다. 한참 뒤 정체가 풀리자 이번에는 목적지가 빠르게 가까워집니다. 이제 막 편하게 말하기 시작했는데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는 셈입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 택시에서 내린다고 케이지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클라크도 그녀 대신 답을 내려주지 못합니다. 그날 밤 생긴 변화가 있다면 애써 피하던 문제를 처음으로 자기 입으로 말해봤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라면 오히려 그 대화가 며칠 뒤 더 생각날 것 같습니다. 집으로 데려다준 택시기사의 이름보다, 그 사람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를 떠올리면서 말입니다.
참고 자료: 자기 노출과 'stranger-on-the-train' 현상에 관한 설명은 아래 학술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Journal of Computer-Mediated Communication 관련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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