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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피해자의 권리일까, 아니면 피해자의 마음과 상관없이 먼저 이루어질 수도 있는 걸까. 《밀양》을 보면서 이 질문 앞에서 오래 멈췄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2007년작 《밀양》에서 가장 오래 남은 것도 아들을 잃는 순간보다 교도소 면회 장면이었습니다.
신애(전도연 분)가 그 자리에서 무너졌을 때, 이상하게도 그 분노만큼은 이해가 됐습니다.

밀양에 내려온 신애는 무엇을 바꾸고 싶었을까
신애는 남편을 잃고 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옵니다. 피아노 학원을 열고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땅을 사고 싶다는 말까지 합니다. 겉으로는 새로운 삶을 꽤 적극적으로 시작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수록 오히려 그녀가 떠나고 싶었던 과거가 더 선명해졌습니다.
여기서 뜬금없이 제가 헬스장을 세 번 등록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등록할 때마다 이번에는 정말 꾸준히 다닐 것 같았습니다. 운동복을 준비하고 시간을 정하면 생활까지 조금 달라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등록한 날이 아니라 다음 날 다시 운동화를 신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운동을 포기했던 경험과 신애가 겪는 상실을 같은 무게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겹쳐 본 건 하나였습니다.
장소와 계획을 바꾼다고 이전의 내가 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신애에게 밀양도 그런 곳처럼 느껴졌습니다. 새로운 주소가 생겼지만 과거가 주소 밖으로 밀려나지는 않습니다.
아들 준마저 잃은 뒤에는 또 다른 시작을 붙잡습니다. 이번에는 교회입니다. 그동안 나오지 않던 울음이 한꺼번에 터지고 표정과 생활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저 역시 그 장면에서는 잠깐 안도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상태를 오래 허락하지 않습니다. 어렵게 찾았다고 생각했던 답이 교도소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뒤집히기 때문입니다.
신애보다 먼저 편안해진 사람
신애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사람을 직접 찾아갑니다. 자신이 믿게 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그를 용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정작 범인은 예상보다 평온합니다.
자신도 하나님께 회개했고 용서받았다며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합니다. 그 자리에서 신애가 무너진 이유를 단순한 신앙의 상실로만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마지막까지 자기에게 남아 있다고 믿었던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용서할지 말지 결정할 몫.
언제 용서할지, 아직 하지 않을지, 어쩌면 끝내하지 못할지도 신애가 결정할 문제였을 겁니다. 그런데 교도소에 도착해 보니 가해자는 이미 용서받았다고 말합니다. 신애의 입장에서는 피해자가 도착하기도 전에 용서가 끝나버린 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녀의 분노에 상당 부분 동의했습니다. 신앙 안에서 가해자가 회개하고 용서받는 것과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닐 겁니다. 적어도 신애에게 두 가지는 완전히 다른 문제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녀의 선택에 전부 동의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애 역시 범인을 용서하면서 자신도 조금은 자유로워지길 기대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자신의 고통도 정리될 거라 믿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도소에서 느낀 감정에는 하나님을 향한 분노뿐 아니라 어렵게 준비한 용서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다는 허탈함도 섞여 있었을 겁니다.
면회 이후에는 믿음에 거칠게 저항합니다. 물건을 훔치고 교회 모임을 방해하며 하늘을 향해 분노를 드러냅니다.
이 부분은 영화를 보면서 가장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교도소 장면 하나만으로도 절망이 충분히 전달됐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저항이 이어지면서 감정적으로 조금 지치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장면들을 모두 불필요하다고 잘라내기는 어렵습니다. 밀양에 온 순간부터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신애의 삶에 답을 내놓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말합니다.
그래서 《밀양》을 종교가 틀렸다고 주장하는 영화로만 읽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제게 더 불편했던 건 타인의 고통을 너무 빨리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태도였습니다. 당사자는 아직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했는데 주변에서는 이유를 만들고 의미를 붙입니다.
전도연 배우의 촬영 이야기도 이 지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당시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상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고, 이창동 감독에게 답을 기대했지만 자신이 느끼는 만큼 표현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촬영 당시에는 그 방식이 답답하고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는 스스로 신애를 찾아가도록 존중받았던 현장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알고 다시 보면 신애의 고통을 쉽게 설명하지 않는 영화와 배우에게 정답을 먼저 주지 않았던 촬영 과정이 묘하게 겹쳐집니다.
마당 한쪽에는 그냥 햇빛이 있었다
마지막에 신애는 집 마당에서 자신의 머리를 자릅니다. 종찬은 옆에서 거울을 들어줍니다. 햇빛은 특별한 곳이 아니라 마당 한쪽에 그냥 떨어져 있습니다.
그 빛을 쉽게 희망이나 구원의 상징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신애의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닙니다. 잃어버린 사람이 돌아온 것도 아니고, 믿음에 대한 분노가 사라졌다고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대신 한 가지 변화는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신의 삶을 해결해 줄 거대한 답을 찾아 더 이상 어디론가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밀양으로 떠났고, 믿음을 붙잡았고, 용서를 시도했던 사람이 이제 자기 집 마당에 앉아 머리를 자릅니다.
헬스장을 세 번째 등록하고 나서야 제가 알게 된 것도 아주 사소한 사실이었습니다. 등록하는 순간보다 다음 날 다시 가는 일이 더 어렵다는 것.
신애의 삶과 비교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지만, 《밀양》을 보고 나니 '다시 시작한다'는 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달라지지 않은 자신을 데리고 다음 날로 넘어가는 것.
영화 앞부분에서 햇빛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말에 신애는 그저 햇빛이라고 반응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마당의 빛 역시 반드시 구원의 선언이어야 할 필요는 없어 보였습니다. 신애의 고통과 상관없이 햇빛은 들어오고 하루는 계속됩니다.
《밀양》을 보고 제게 남은 것도 '용서하면 구원받는다'는 깔끔한 답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끝내 설명되지 않는 고통도 있고, 당장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살아야 하는 날도 있습니다. 선의로 건넨 위로나 용서라는 말조차 누군가에게는 너무 이른 대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마당입니다. 종찬이 들어주는 거울, 잘려나가는 머리카락, 땅 한쪽에 들어온 햇빛.
처음에는 그 빛에서 무언가 의미를 찾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신애가 아직 살아 있고, 다음 날도 올 테니까요.
참고 자료
전도연 배우의 《밀양》 촬영 경험 및 작품 관련 인터뷰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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