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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웨이, 잘 익는다는 것의 의미

dailyroutine15 2026. 8. 22. 09:18

목차


    사이드웨이

    와인병을 보면 맛을 알기도 전에 라벨부터 눈에 들어옵니다. 사람을 볼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몇 가지 보이는 조건만으로 그 사람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사이드웨이》의 마일즈를 보면서 그 습관이 묘하게 겹쳐 보였습니다. 와인 한 잔은 향을 맡고 천천히 맛보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몇 번의 실패만으로 너무 빨리 점수를 매기는 사람.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와인보다 먼저 궁금해졌습니다. 우리는 왜 사람에게는 와인 한 잔만큼의 시간도 주지 못하는 걸까.



    와인은 열어보면서 사람은 왜 미리 판단할까

    마일즈가 와인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꽤 까다롭습니다. 잔에 따르고, 향을 맡고, 천천히 맛을 확인합니다. 같은 품종이라고 모두 같은 맛이 나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중요하게 봅니다.

    그 모습을 보다가 학창 시절 운동장이 떠올랐습니다. 체육 시간이 되면 저도 모르게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친구가 운동을 잘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반대로 키가 작은 저는 처음부터 눈에 띄는 쪽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달리기를 하고 철봉에 매달리면 예상이 달라질 때가 있었습니다. 특히 턱걸이를 시작하면 주변에서 의외라는 표정을 짓곤 했습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겉모습만 보고 저를 판단한다는 사실만 생각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저 역시 똑같았습니다. 다른 친구를 보면서 이미 머릿속으로 순위를 정해놓고 있었으니까요.

    판단받았던 기억은 오래 남았는데, 내가 누군가를 판단했던 기억은 쉽게 잊고 있었습니다. 《사이드웨이》를 보면서 그 사실이 조금 불편하게 돌아왔습니다.

    제가 멈춰 본 지점: 와인은 직접 맛보고 판단하면서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몇 가지 조건만으로 너무 쉽게 결론을 내린다.

    마일즈가 피노 누아를 좋아하는 게 묘하게 보였다

    마일즈가 유독 애정을 보이는 와인은 피노 누아(Pinot Noir)입니다. 비교적 얇은 껍질을 가진 포도 품종으로 알려져 있고, 재배 환경과 생산 방식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저는 품종 자체보다 마일즈가 피노 누아를 이야기하는 태도가 더 재미있었습니다. 와인에 대해서는 작은 차이까지 받아들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일즈에게는 그 까다로움과 섬세함조차 피노 누아를 좋아하는 이유처럼 보입니다.

    그런 사람이 정작 자신에게는 관대하지 않습니다.

    이혼했다는 것, 소설가로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것, 지금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몇 가지 실패를 모아 자기 인생 전체를 평가해 버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그래서 마일즈가 와인을 설명할수록 오히려 사람이 더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와인 한 병에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맛이 있을 수 있다고 믿으면서, 자기 안에는 더 이상 발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았습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이드웨이》의 와인을 사람의 삶과 연결하다 보니 ‘숙성’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다 사람도 와인처럼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나아지는 걸까 하는 생각이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서 조금 멈추게 됐습니다.

    나이를 먹는 것과 나아지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시간만 흘려보낸다고 사람이 저절로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학창 시절 제가 턱걸이 횟수를 늘렸던 것도 시간이 해결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철봉을 잡아야 했습니다. 한 개를 당기고, 다음에는 하나를 더 해보고, 실패하면 다시 매달렸습니다. 가만히 운동장 옆에 서서 몇 달을 기다렸다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마일즈를 보면서 답답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상처가 있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때로는 그 상처 뒤에 숨어 새로운 선택을 미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의 상처를 턱걸이처럼 노력하면 해결되는 문제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일은 시간이 필요하고 쉽게 정리되지도 않습니다. 다만 시간이 흐르는 것과 내가 달라지는 것을 같은 의미로 생각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숙성이라는 비유에서 제가 멈춘 지점: 시간이 사람을 바꿔주기도 하지만, 어떤 변화는 결국 다시 움직여보는 데서 시작된다.

    마일즈와 잭, 둘 중 누구도 답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잭의 방식이 더 나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마일즈가 지나간 일에 붙잡혀 있다면 잭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순간의 즐거움을 좇고, 그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남길지는 뒤로 미룹니다.

    저는 두 사람이 정반대라서 오히려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마일즈는 과거 때문에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잭은 오늘만 생각하느라 내일을 제대로 보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너무 오래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너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여행이 두 중년 남자가 와이너리를 돌아다니는 유쾌한 여행으로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각자 다른 방법으로 자기 삶에서 옆길로 빠져 있는 두 사람이 정말 조금이라도 앞으로 갈 수 있을지를 지켜보는 여행에 가까웠습니다.

    마일즈에게 쉽게 공감하면서도 그의 모든 행동을 이해해주고 싶지는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상처받았다는 사실과 그 뒤의 모든 선택이 정당하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오래됐다는 것과 잘 익었다는 것은 다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처음의 철봉 기억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키가 작다는 이유로 운동을 못할 것이라는 예상도 틀렸고, 키가 크다는 이유로 잘할 것이라는 제 예상도 틀릴 때가 있었습니다. 결국 철봉 앞에서는 직접 매달려봐야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직업 하나, 나이 하나, 실패 한 번으로 그 사람 전체를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쩌면 더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너무 빨리 점수를 매기지 않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마일즈가 와인을 대하는 정도의 인내심을 자기 자신에게도 조금만 줬다면 어땠을까 생각했습니다. 기다리기만 하지 않고 철봉을 다시 잡듯 자신의 삶을 한번 움직여봤다면 또 어땠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게 《사이드웨이》는 와인을 알고 보면 재미있는 영화이면서도, 와인을 몰라도 충분히 씁쓸한 영화였습니다.

    오래됐다는 것과 잘 익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철봉 앞에서는 결국 손을 뻗어야 했습니다. 마일즈에게도 필요했던 건 어쩌면 조금 더 오래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다시 한번 손을 뻗어보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