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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문 앞까지 갔다가 혼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선 적이 있습니다. 배가 고픈데도 혼자 앉아 밥을 먹는 모습을 누가 쳐다볼까 신경 쓰였던 시절입니다. 혼자 영화를 보는 것도, 혼자 술을 마시는 것도 어색했습니다. 그때는 나이를 먹으면 이런 망설임쯤은 자연스럽게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보니 사라진 자리에는 또 다른 망설임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언어의 정원》을 보면서 이상하게 그 생각이 났습니다.
열다섯 살은 걷고, 스물일곱 살은 멈춰 있었습니다
《언어의 정원》은 구두 만드는 일을 꿈꾸는 고등학생 타카오와 유키노가 비 오는 아침 정원에서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합니다. 타카오는 비가 오는 오전이면 학교 대신 정원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유키노와 반복해서 마주칩니다.
처음에는 비와 정원이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낭만적인 장치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조금 달랐습니다. 두 사람 모두 그곳에 있어야 할 이유보다 다른 곳에 가지 못할 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타카오는 학교를 빠지고 있었고, 유키노 역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만 허락되는 작은 도피처였던 셈입니다.
제가 더 오래 바라본 사람은 타카오보다 유키노였습니다. 타카오는 열다섯 살인데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구두를 만들고 싶어 하고, 그 일을 배우기 위해 돈을 모으며 실제로 손을 움직입니다. 잘 만들지 못해도 계속 만듭니다.
반면 유키노는 스물일곱 살입니다. 나이만 보면 타카오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자기 삶도 잘 꾸려갈 것 같지만 정작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학교에서 벌어진 일로 상처받은 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조차 힘겨워합니다.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저도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고, 자격증 공부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려고 하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지, 돈은 얼마나 들어가는지, 시작했다가 또 그만두지는 않을지부터 계산했습니다. 계획을 세우는 동안 정작 첫날은 계속 뒤로 밀렸습니다.
예전에는 혼자 식당에 들어가는 것조차 어려웠는데 이제는 혼자 영화를 보는 일이 별로 어색하지 않습니다. 분명 예전보다 할 수 있는 일은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첫발이 무거운 일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다만 대상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그래서 타카오의 구두가 다르게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타카오가 유키노에게 만들어주는 구두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건네는 선물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니 구두라는 물건을 굳이 선택한 이유가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구두는 사람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구두를 신어도 걷는 건 결국 자기 몫입니다.
그래서 저는 타카오가 유키노를 구해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열다섯 살 소년이 스물일곱 살 어른의 인생을 해결해 준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오히려 이 영화가 불편해집니다. 타카오는 유키노 대신 학교에 갈 수도 없고, 그녀가 겪은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대신 한동안 멈춰 있던 사람에게 다시 걸어볼 마음을 만들어줍니다. 저는 그 정도의 관계라서 오히려 좋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운동이나 자격증도 비슷했습니다. 누군가 운동화를 사준다고 제가 운동을 시작하는 것은 아니고, 좋은 교재를 추천해 준다고 자격증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마지막에는 제가 체육관 문을 열거나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쳐야 합니다.
그래서 유키노를 위한 구두를 만드는 타카오의 손을 보면서 오히려 제가 미뤄둔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필요한 것은 완벽하게 준비된 다음의 시작이 아니라, 준비가 덜 됐더라도 한번 움직여보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쁜 장면이라고 그냥 넘기기에는 불편한 관계였습니다
다만 저는 타카오와 유키노의 관계를 무조건 아름다운 사랑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습니다.
비 내리는 정원과 빗소리, 두 사람이 나누는 음식과 대화를 보고 있으면 둘 사이의 나이 차이를 잠시 잊게 됩니다. 하지만 정원 밖으로 나오면 타카오는 열다섯 살 학생이고 유키노는 스물일곱 살 교사입니다. 더구나 두 사람은 같은 학교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유키노가 처음부터 타카오를 유혹하거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구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유키노 역시 학교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무너져 있었고, 타카오는 이유를 캐묻지 않고 옆에 있어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를 한마디로 부적절한 관계라고 정리해 버리는 것도 영화가 보여준 감정을 너무 간단하게 잘라내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유키노가 힘들었다는 이유로 어른으로서의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타카오의 감정이 커질수록 그 감정을 어디까지 받아들일 것인지 판단해야 하는 쪽은 유키노에 더 가까웠습니다. 현실에서 같은 상황을 봤다면 저는 영화에서처럼 낭만적으로 바라보기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두 사람이 계속 정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에게 그 정원은 두 사람이 평생 함께 살아야 할 장소가 아니라 잠깐 비를 피했던 처마에 가깝습니다. 비를 피하는 동안 누군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버틸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비가 그쳤는데도 계속 그곳에 앉아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비가 그친 뒤에도 정원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제가 좋아하는 것은 비가 영원히 내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장마가 끝나자 타카오와 유키노를 자연스럽게 만나게 해 주던 이유도 사라집니다. 처음에는 두 사람에게 맑은 날이 야속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비가 그쳐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비가 왔다면 두 사람은 정원 안에서는 편안했을 겁니다. 타카오는 학교 대신 그곳으로 가고, 유키노 역시 자신이 돌아가야 할 현실을 조금 더 미룰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편안한 장소가 언제나 사람을 앞으로 보내주는 것은 아닙니다.
저에게도 비슷한 핑계가 있었습니다. 운동은 조금 덜 바빠지면, 자격증은 시간이 생기면 시작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는 완벽하게 한가한 날이 좀처럼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과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 방향만 다를 뿐 무언가를 미루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언어의 정원》의 맑은 날이 저는 싫지 않습니다. 두 사람을 떼어놓기 때문이 아니라, 정원 밖에서도 살아볼 차례가 왔다는 신호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보기 전에 궁금할 만한 두 가지
Q. 《언어의 정원》은 러닝타임이 얼마나 되나요?
A. 약 46분입니다. 짧은 작품이지만 여러 사건을 빠르게 보여주기보다 비 오는 정원과 두 인물의 감정에 시간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저는 긴 장편을 본다기보다 한 계절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Q. 타카오와 유키노의 관계는 사랑인가요?
A. 저는 연애라는 한 단어로 정리하지 않는 편이 이 작품과 더 잘 맞았습니다. 서로에게 끌리는 감정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학생과 교사라는 현실적인 경계도 존재합니다. 제게는 연인이 되기 위한 만남보다 각자 다시 걸어가기 직전에 만난 두 사람의 관계가 더 크게 남았습니다.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구두는 무엇일까
《언어의 정원》을 보고 운동 계획표를 새로 만들거나 자격증 교재부터 주문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마음먹은 김에 계획부터 크게 세웠을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는 생각이 조금 달랐습니다. 혼자 밥을 먹지 못하던 시절에도 어느 날 처음 혼자 식당 문을 열었던 순간이 있었을 겁니다. 지금은 너무 자연스러워져서 그날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운동도, 자격증도 어쩌면 그렇게 시작하면 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단한 결심보다 운동화 한번 신어보고, 책 몇 페이지라도 펼쳐보는 것부터 말입니다.
타카오가 만든 구두를 보면서 저는 유키노보다 제 발을 한번 내려다보게 됐습니다. 어디로 갈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아직 준비가 덜 됐다는 이유로 출발하지 않고 있었던 건 아닐까.
비가 그쳤습니다. 이제 정원에서 일어날 차례입니다.
작품 정보 참고: 제작사 CoMix Wave Films 공식 작품 소개 기준으로 《언어의 정원》은 신카이 마코토가 원작·각본·감독을 맡았으며 러닝타임은 46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