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를 처음 봤을 때 헥토르를 제대로 보지 않았습니다. 눈이 온통 아킬레스에게 가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주말에 《오디세이》를 보고 집에 돌아와 늦은 밤 《트로이》를 다시 틀었더니, 전혀 다른 영화처럼 느껴졌습니다. 같은 신화에서 출발한 두 이야기를 하루 사이에 이어 본 건 처음이었는데, 그게 생각보다 많은 걸 흔들어 놨습니다.헥토르가 다시 보인 밤 — 전쟁의 배경과 맥락영화 《트로이》는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전통적으로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한 역사서가 아니라, 전쟁 막바지의 짧은 기간과 아킬레스의 분노를 중심으로 풀어낸 서사시입니다. 영화는 여기에 다른 신화와 전승의 요소까지 더하면서, 신들의 ..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를 처음에는 외계에서 온 침입자처럼 봤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보고 나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정말 이들이 침입한 걸까. 어쩌면 인간 쪽이 먼저 다른 생명체의 영역을 침범해온 것은 아닐까. 잠들기 전 가볍게 틀었던 영화인데, 마지막에는 그 질문 때문에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라스트 하우스 생명체 정체, 외계인보다 먼저 떠오른 것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의문은 저 존재들이 대체 어디서 왔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흔한 외계 침공 장르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후반으로 갈수록 제 생각은 달라졌습니다. 바다와 연결된 생명체의 특징과 루스가 언급하는 오래된 해양 괴물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인간보다 먼저 이곳에 있었던 존재처럼 보입니다.영화가 그 기원을 명확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혼자 옷도 입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도 사랑은 영화처럼 아름다울까요. 몇 년 전 여자친구가 사고로 어깨 수술을 받았고, 저는 옷을 갈아입히고 샤워를 도왔습니다. 그때는 사랑보다 미안함이 더 컸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만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러브 어페어》 속 테리가 사고를 숨기는 장면에 완전히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20대였다면 두 사람의 재회에 설렜겠지만, 40대가 된 지금은 다른 게 궁금합니다. 다시 만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건, 그다음에도 계속 곁에 있는 일이 아닐까요. 영화는 재회에서 끝나지만 현실의 사랑은 그다음 날부터 시작됩니다.감정의 무게 — 설렘보다 오래가는 것영화에서 마이크와 테리는 비행기에서 처음 만납니다. 문제는 둘 다 이미 다른 사람과 미래를 약속한 상태라는 점입니다...
제작비가 3,500억 원이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사실 크게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요즘 대작 영화 제작비가 워낙 크다 보니 '놀란이 이번에도 크게 만들었구나'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8월 8일 수원 롯데시네마에서 직접 보고 나오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돈을 많이 쓴 영화와 공을 많이 들인 영화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글은 영화 전문가의 리뷰가 아닙니다. 평일에 극장을 못 가는 직장인이 주말 아침 일찍 예매해두고 며칠을 기다린 끝에 본 한 편의 영화 이야기입니다.오전 10시 상영이었지만 괜히 늦기 싫어서 30분 정도 일찍 극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롯데시네마 층에 도착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조금 놀랐습니다. 사람이 정말 많았습니다. 순간 '이 사람들 설마 전부 오디세이 보..
스물한 살의 저는 제 돈으로 살아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아르바이트도 거의 하지 않았고, 부모님에게 받은 용돈으로 친구들과 놀면서도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취업하면 그때부터 벌면 되지." 정말 그렇게 믿었습니다.그런 제가 마흔이 넘어 《백만엔걸 스즈코》를 보니 조금 뜨끔했습니다. 스물한 살의 스즈코는 100만 엔을 모아 다음 도시로 떠나는데, 같은 나이의 저는 부모님에게 다음 달 용돈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영화를 보는 내내 한 가지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스물한 살에 대체 무엇을 모으고 있었을까.스물한 살의 저는 시간이 많은 줄 알았습니다20대 초반의 저는 아르바이트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과 노는 게 좋았고 취업은 조금 늦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모..
《메멘토》를 처음 봤을 때 저는 줄거리를 절반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독특한 구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상하게도 레너드가 사진을 찍고 몸에 문신을 새기며 기록에 매달리는 모습만큼은 낯설지 않았습니다. 품질관리 일을 오래 하면서 저 역시 사람의 기억보다 검사표와 사진, 숫자로 남은 기록을 먼저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기억은 틀려도 기록은 남는다고 믿으며 일해왔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범인이 누구였는지보다 제가 매일 들여다보던 검사표와 데이터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조금 불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과 그 기록이 진실이라는 것은 정말 같은 말일까. 《메멘토》는 제가 오랫동안 의심하지 않았던 바로 그 믿음부터 흔들어놓았습니다.메멘토..